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시편 강해 7장 [회개하지 못한 자의 심판]
시편 7장
[회개치 못한 자의 심판]
1.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17절까지)
시편 7장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이 배경이지만, 실제로는 사울이 아니라 왕권의 안정을 위해 다윗을 죽여야 한다면서 사울을 충동질하는 한 신하를 겨냥해 다윗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문제를 많이 해결한 사람인데, 여기에서는 작은 한 사람 때문에 처절한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큰 문제를 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삶 가운데 작은 문제를 가지고도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는 훈련을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아주 작은 문제 하나라도 늘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문제, 취직 문제 같은 큰 문제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작은 문제 같은 것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을 때 우리의 신앙이 섬세해지고 재밌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 살면서 큰 건 별로 없고 대부분 작은 일들이죠. 사람들이 다툴 때도 작은 것 때문에 다투는 것이지, 큰 것으로 잘 다투지 않기 때문에 작은 거 하나하나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피한다는 것은 ‘내가 주를 의지하오니’를 이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피한다는 것은 ‘내가 주를 의지하오니’를 이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쫓는 것은 원어 ‘박해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다윗은 사울과 그의 신하가 자신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데 ‘나를 구원하여 건지소서’입니다. ‘구원’은 총제적인 의미이고 ‘건짐’은 실제 건짐 받는 것인데. 물에서 건짐 받았다고 할 때 사실은 건짐 받은 것이 구원의 요체가 되고, 구원은 물에서 건짐 받는 총체를 의미합니다.
2절입니다.
‘건져낼 자 없으면’ 원어는 ‘건지지 않는다면’입니다.
‘그들이 나를 사자같이 찢고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다윗이 심적으로 고통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보통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이지 몸을 찢겠어요? 그런데 다윗은 지금 자신의 몸이 뜯기고 찢기는 것을 연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굉장히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뜯김 당할 죄, 즉 ‘이런 해를 당할 원인제공을 했거나’ 또는 ‘어떤 죄를 저질렀거나’입니다.
4절입니다.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평화로운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게 악하게 보답했었거나'입니다.
‘내 대적에게서 까닭없이 빼앗았거든’ 오번역입니다. 여기에서는 다윗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원수가 되는 그들에게 선하게 대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데, 다윗은 지금 자기를 사자처럼 찢으려 하는 자들에게 이런 걸 당해야 할 원인을 제공한 일이 없고, 화평한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악으로 갚지 않았고, 원수들에게도 좋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원수가 내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사라지게 하소서’ 앞의 고백에 이어서 이 부분도 오번역으로 다윗이 지금 원수들의 공격 앞에 ‘내 생명이 땅에 짓밟히지 않고 내 영광이 먼지 속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장면이 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는 다윗이 쫓김을 당하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하는 정확한 간구입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5절까지는 상황을 통해 일반 간구를 드린 것이고, 6절은 드디어 하나님 앞에 행동을 요청합니다. 원어는 ‘원수들의 분노에 대해서 하나님이여 제발 좀 일어나소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해 액션을 요구하는 사항입니다.
‘나를 위하여 깨소서’ 하나님은 잠잘 수가 없는데 다윗은 하나님이 잠자는 것처럼 말합니다.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오번역입니다. ‘나를 위해 깨셔야 하는데 주께서 심판을 명하시기 위함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을 선한 쪽으로, 사울을 악한 쪽으로 첫 번째 구도를 잡습니다. 기도할 때 내가 선한 쪽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확립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에게 임합니다. 다윗은 지금 논리 정연하게 ‘하나님! 나는 선한 쪽에 있어요! 그런 일은 행하지 않았어요!’하고, 상대편 사울과 그 신하들을 악인으로 구도를 잡습니다.
우리가 재판할 때 ‘하나님 승리케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툼이나 손해배상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내가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때가 많은데, 그런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선한 구도에 있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확립된 다음에 6절 기도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장사하거나,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가 악화되면 그때, 다들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선한 쪽, 상대방은 나쁜 쪽으로 몰아놓고 바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정말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가? 잘 점검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 점에서 정말 놀라운 사람입니다. 우리 같으면 바로 6절의 기도로 돌입해서 ‘하나님! 저들을 심판해 주세요’라고 외칠텐데,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이 상대로부터 당해야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음을 정확하게 아뢰면서 자신을 선인과 의인으로 만들어 놓고, 사울과 그 신하를 악인임을 밝힙니다. 이 작업이 다윗의 놀라운 특징이며 장점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다윗은 사울과 그의 신하가 자신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데 ‘나를 구원하여 건지소서’입니다. ‘구원’은 총제적인 의미이고 ‘건짐’은 실제 건짐 받는 것인데. 물에서 건짐 받았다고 할 때 사실은 건짐 받은 것이 구원의 요체가 되고, 구원은 물에서 건짐 받는 총체를 의미합니다.
2절입니다.
‘건져낼 자 없으면’ 원어는 ‘건지지 않는다면’입니다.
‘그들이 나를 사자같이 찢고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다윗이 심적으로 고통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보통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이지 몸을 찢겠어요? 그런데 다윗은 지금 자신의 몸이 뜯기고 찢기는 것을 연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굉장히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뜯김 당할 죄, 즉 ‘이런 해를 당할 원인제공을 했거나’ 또는 ‘어떤 죄를 저질렀거나’입니다.
4절입니다.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평화로운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게 악하게 보답했었거나'입니다.
‘내 대적에게서 까닭없이 빼앗았거든’ 오번역입니다. 여기에서는 다윗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원수가 되는 그들에게 선하게 대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데, 다윗은 지금 자기를 사자처럼 찢으려 하는 자들에게 이런 걸 당해야 할 원인을 제공한 일이 없고, 화평한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악으로 갚지 않았고, 원수들에게도 좋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원수가 내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사라지게 하소서’ 앞의 고백에 이어서 이 부분도 오번역으로 다윗이 지금 원수들의 공격 앞에 ‘내 생명이 땅에 짓밟히지 않고 내 영광이 먼지 속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장면이 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는 다윗이 쫓김을 당하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하는 정확한 간구입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5절까지는 상황을 통해 일반 간구를 드린 것이고, 6절은 드디어 하나님 앞에 행동을 요청합니다. 원어는 ‘원수들의 분노에 대해서 하나님이여 제발 좀 일어나소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해 액션을 요구하는 사항입니다.
‘나를 위하여 깨소서’ 하나님은 잠잘 수가 없는데 다윗은 하나님이 잠자는 것처럼 말합니다.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오번역입니다. ‘나를 위해 깨셔야 하는데 주께서 심판을 명하시기 위함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을 선한 쪽으로, 사울을 악한 쪽으로 첫 번째 구도를 잡습니다. 기도할 때 내가 선한 쪽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확립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에게 임합니다. 다윗은 지금 논리 정연하게 ‘하나님! 나는 선한 쪽에 있어요! 그런 일은 행하지 않았어요!’하고, 상대편 사울과 그 신하들을 악인으로 구도를 잡습니다.
우리가 재판할 때 ‘하나님 승리케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툼이나 손해배상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내가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때가 많은데, 그런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선한 구도에 있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확립된 다음에 6절 기도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장사하거나,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가 악화되면 그때, 다들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선한 쪽, 상대방은 나쁜 쪽으로 몰아놓고 바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정말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가? 잘 점검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 점에서 정말 놀라운 사람입니다. 우리 같으면 바로 6절의 기도로 돌입해서 ‘하나님! 저들을 심판해 주세요’라고 외칠텐데,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이 상대로부터 당해야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음을 정확하게 아뢰면서 자신을 선인과 의인으로 만들어 놓고, 사울과 그 신하를 악인임을 밝힙니다. 이 작업이 다윗의 놀라운 특징이며 장점입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하나님께 움직임을 요청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속성상 하나님은 의인 구원, 악인 심판이기 때문에 내가 악인이면서, 내가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전쟁이 많았습니다. 그때 다 자기 나라가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영국이 독일에 대해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 이유는 그때 기도하던 사람들이 영국이 선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기도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우리 편이 정말 선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 일어나세요. 날 위해 깨셔서 심판을 명령해 주세요.”하고 우리의 간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사실은 ‘백성들의 모임이 주를 사방으로 두르게 하시고’입니다.
7절입니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사실은 ‘백성들의 모임이 주를 사방으로 두르게 하시고’입니다.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지금 다윗은 마치 하나님이 자리를 이탈한 것처럼 “하나님, 지금 자리를 이탈하셨어요. 제가 어려운 가운데 있으니, 자리에 돌아오셔서 심판을 행하여 주세요”라고 청원합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만민은 백성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 믿는 자들과 본인에 대해서 자기 의와 성실함에 대해 먼저 심판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의로운데, 하나님께 ‘나를 먼저 심판해 달라’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떳떳함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입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만민은 백성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 믿는 자들과 본인에 대해서 자기 의와 성실함에 대해 먼저 심판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의로운데, 하나님께 ‘나를 먼저 심판해 달라’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떳떳함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먼저 내 삶이 하나님 앞에 투명하고 거짓이 없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제사장과 선지자와 종교 지도자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떳떳함으로 나갑니다. 쉽지 않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 한번 심판해 주세요!’ 이런 기도 하지 못합니다. 저 사람 다리 좀 부러뜨려 주시고~ 하면서 저 사람 향해서 기도하는데, 다윗은 자신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인 백성을 불러 주를 두르게 하고 심판하소서’ 하고 요청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심판의 대상을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도 포함시켰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신앙은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교회 목사가 왜 지옥에 가느냐? 이 사람, 저 사람 심판은 잘하면서 ‘나는 괜찮아’하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다가 어딨습니까? 하나님 앞에 사실은 목사나 인도 받는 자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도자가 되면 자기는 괜찮고, 너는? 이라고 하는데 다윗은 이게 다릅니다. 다윗은 ‘나부터 심판하세요!’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장면입니다.
9절입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오번역인데 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결시키다(come to an end)’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여, 악인의 악이 종결지어지게 해주세요’라는 요청인데, 다윗의 기도 내용은 악인을 처단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악인의 악이 멈춰지게 해주세요!’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참 거룩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죄가 없는데, 사울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낮 10년 동안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 같으면 사울을 없애주시고, 땅이 갈라지게 해주시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지 않고 “하나님, 제발 악이 멈춰지게 해주세요”라고 합니다. 우리는 정말 상상하지 못합니다. 다윗의 심판 개념도 우리하고 다릅니다.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의인의 기준은 행동에 있지 않습니다. 의인의 기준은 마음과 양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범죄하지 않으면 의인이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동기를 보시고 숨은 생각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양심과 동기가 안 좋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화를 내십니다. 우리가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마음의 깊은 동기는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와 숨은 생각을 보시는데, 다윗은 지금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양심이 깨끗해야 됩니다.
항상 신앙은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교회 목사가 왜 지옥에 가느냐? 이 사람, 저 사람 심판은 잘하면서 ‘나는 괜찮아’하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다가 어딨습니까? 하나님 앞에 사실은 목사나 인도 받는 자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도자가 되면 자기는 괜찮고, 너는? 이라고 하는데 다윗은 이게 다릅니다. 다윗은 ‘나부터 심판하세요!’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장면입니다.
9절입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오번역인데 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결시키다(come to an end)’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여, 악인의 악이 종결지어지게 해주세요’라는 요청인데, 다윗의 기도 내용은 악인을 처단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악인의 악이 멈춰지게 해주세요!’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참 거룩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죄가 없는데, 사울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낮 10년 동안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 같으면 사울을 없애주시고, 땅이 갈라지게 해주시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지 않고 “하나님, 제발 악이 멈춰지게 해주세요”라고 합니다. 우리는 정말 상상하지 못합니다. 다윗의 심판 개념도 우리하고 다릅니다.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의인의 기준은 행동에 있지 않습니다. 의인의 기준은 마음과 양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범죄하지 않으면 의인이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동기를 보시고 숨은 생각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양심과 동기가 안 좋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화를 내십니다. 우리가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마음의 깊은 동기는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와 숨은 생각을 보시는데, 다윗은 지금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양심이 깨끗해야 됩니다.
중생은 양심이 피 뿌림을 받아서 씻음 받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 십자가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내 양심이 주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는 첫 번째가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내가 주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을 때 양심이 살아나서 그전에는 죄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누구를 많이 미워해도 죄가 아니었는데, 어느날 내가 주님의 보혈로 씻겨져 미워했던 마음이 너무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 죄의 고통이 느껴지는 게 바로 양심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양심은 율법입니다. 율법과 양심은 동일한데, 우리는 율법을 대해도 느낌이 없었는데 양심이 살아나니까 율법에 저촉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미움이나 음란이 죄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미움이나 음란이 죄가 되는 것을 양심이 살아나 아는 것입니다.
양심이 부활되는 게 중생입니다. 거듭나면 양심이 살아나게 됩니다. 양심이 털났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우리가 타락하면 양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우리 안에 있어요. 이 양심은 우리 안에 마음판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마음의 한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양심은 우리가 살면서 점점 마비되는데, 거듭나면 양심이 살아나서 죄에 대해 민감해지며 양심의 거룩이 살아나서 행동이 변화됩니다. 율법이 아닌데 이 양심이 내재적으로 자꾸 옳은 대로 우리를 끌고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양심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0절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약간 오번역인데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다윗이 말하는 의가 뭘까요? 누구를 죽이려하는 마음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사울과 그의 신하들이 죽이려고 행동하고 있지만, ‘하나님! 내 마음은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양심이 깨끗해요! 하나님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아요! 나는 그들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이게 다윗입니다.
제가 옛날에 큰 금액의 손해배상이 들어왔어요. 받자마자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그들이 옳아요!’ 정말 그들이 옳을까요? 그러나 내 마음은 그렇습니다. 내가 거짓된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 법원의 내용을 읽고 내가 6개월을 매일 울면서 회개합니다. 그 법원의 내용들이 내게 맞지 않았지만, 그 앞에 내가 회개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잘못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제가 양심이 거짓된 사람이에요!’하고 6개월을 회개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이 늘 편한데 그렇게 편할 수 없어요. 내가 만약 분노하고 욕하면 나도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열 받고 좀 힘들더라구요! 그러나 내가 자꾸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로 들어가니까 마음은 편해지고 하나님이란 분이 점점 가까이 이해되었습니다. 저는 안 보고도 사람들을 압니다. 이게 그때 생긴 것입니다. 그때 이런 일 가운데서, 사람들이 시선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아! 사람들은 이런 마음으로 살아왔구나!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구나!’ 하는 것이, 저에게 투영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윗도 이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는 마음이 정직해요!’ 우리는 나 자신의 의를 주장할 때 행동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의로워야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방패가 되어주시는데, 마음에서부터의 의를 원하십니다.
11절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불의에 대해 재판하시며 심판하시기 때문에 늘 매일 분노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실까?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볼 때 매일 분노하세요. 하나님은 자기의 뜻과 맞지 않으면 화를 내십니다. 나한테 얘기를 안 하시니까 물론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심이 부활되는 게 중생입니다. 거듭나면 양심이 살아나게 됩니다. 양심이 털났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우리가 타락하면 양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우리 안에 있어요. 이 양심은 우리 안에 마음판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마음의 한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양심은 우리가 살면서 점점 마비되는데, 거듭나면 양심이 살아나서 죄에 대해 민감해지며 양심의 거룩이 살아나서 행동이 변화됩니다. 율법이 아닌데 이 양심이 내재적으로 자꾸 옳은 대로 우리를 끌고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양심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0절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약간 오번역인데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다윗이 말하는 의가 뭘까요? 누구를 죽이려하는 마음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사울과 그의 신하들이 죽이려고 행동하고 있지만, ‘하나님! 내 마음은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양심이 깨끗해요! 하나님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아요! 나는 그들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이게 다윗입니다.
제가 옛날에 큰 금액의 손해배상이 들어왔어요. 받자마자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그들이 옳아요!’ 정말 그들이 옳을까요? 그러나 내 마음은 그렇습니다. 내가 거짓된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 법원의 내용을 읽고 내가 6개월을 매일 울면서 회개합니다. 그 법원의 내용들이 내게 맞지 않았지만, 그 앞에 내가 회개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잘못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제가 양심이 거짓된 사람이에요!’하고 6개월을 회개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이 늘 편한데 그렇게 편할 수 없어요. 내가 만약 분노하고 욕하면 나도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열 받고 좀 힘들더라구요! 그러나 내가 자꾸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로 들어가니까 마음은 편해지고 하나님이란 분이 점점 가까이 이해되었습니다. 저는 안 보고도 사람들을 압니다. 이게 그때 생긴 것입니다. 그때 이런 일 가운데서, 사람들이 시선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아! 사람들은 이런 마음으로 살아왔구나!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구나!’ 하는 것이, 저에게 투영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윗도 이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는 마음이 정직해요!’ 우리는 나 자신의 의를 주장할 때 행동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의로워야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방패가 되어주시는데, 마음에서부터의 의를 원하십니다.
11절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불의에 대해 재판하시며 심판하시기 때문에 늘 매일 분노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실까?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볼 때 매일 분노하세요. 하나님은 자기의 뜻과 맞지 않으면 화를 내십니다. 나한테 얘기를 안 하시니까 물론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싸웁니까? 뜻이 안 맞으니까 싸웁니다. 싸우는 것은 분노가 섞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와 뜻이 안 맞으면 나에 대해 분노가 섞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하나님 뜻대로 못 가면 하나님은 나에 대해 매일 분노하십니다. 단지 우리가 못 느낄 뿐이에요. 언제 압니까?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마음대로 살려고 하면 가만 안 두십니다. 그게 언제 보입니까? 나중에 보이는데 하나님의 감정표현은 매우 느립니다. 사람은 즉각적입니다. 한마디 들으면 바로 다투는데 하나님은 감정표현이 늦어서 나중에 표현하십니다. 사람은 분노하자다투고 이별합니다.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데 나중에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사람한테 자꾸 묻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생각을 내가 대신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무라실 때 우리는 ‘하나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하고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화를 내셨는데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하는 게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패망케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인이 올 때 바로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께 겸손을 보이면 하나님은 화를 내시다가도 마음을 돌리십니다. 지금 다윗이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신다고 한 말은 진리입니다.
12절입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원어는 ‘돌이키지 아니하면’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우리말이지 원어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아직 칼로 우리를 찌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칼을 계속 가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 자신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울과 그의 신하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들이 빨리 악을 멈추고 돌아서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칼을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단명합니다. 때로는 재난으로 장애자가 됩니다. 때로는 질병 가운데 떨어집니다. 때로는 파산합니다. 때로는 가족에게서 버림받습니다. 때로는 사회 밑바닥에 떨어져서 찜질방이나 고시원,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되거나, 때로는 정신이 돌아서 이상한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내리실 때는 그것을 보여주시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칼을 가시다가 치실 때는 우리 삶에 엄청난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 배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지만, 그 전에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는데 회개는 계속, 매일 하는 작업입니다. “하나님 오늘 내가 어떤 걸 잘못했습니까?”하고 매일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과거가 아닙니다. 회개는 매일 하는 것입니다. 왜?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이 칼을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활을 당기면 준비상태입니다. 손만 놓으면 화살이 날아갑니다. 당긴 상태는 심판 직전입니다.
13절입니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아! 좀 무섭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절정입니다. 나이들면 다 죽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나이 먹어서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는 안 죽다가 나이 먹으면 죽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서 죽을 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시 회개하면 안 죽고 연장됩니다.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합니다.
우리 아버님이 지금 살아계십니다. 혈기가 좀 있으신데 혈기의 영 때문에 다리가 부러졌어요. 아버님이 가끔 혈기가 나올 때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회개의 찬송을 하게 하셔서 마음으로 회개하게 하시고, 수명이 또 늘어나고, 또 나아가는 거에요. 하나님은 화가 많이 나면 결국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은 없어요. 가장 강력한 심판은 우리를 죽이는 거에요. 나중에 사울은 죽게 되는데 그의 편도 다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지 않을 때 죽일 도구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래 사는 비결, 축복의 비결은 회개입니다.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이것도 사실은 오번역이고 비약적 번역입니다. 원래 ‘불살’이라는 단어는 없고 그분은 만드시는데 과녁을 맞추는 화살입니다’ 화살은 맞으면 당장은 안 죽고 큰 상해를 입습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상해를 입습니다.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피부가 상하기도 하고 피가 나기도 합니다. 화살이 떠나면 우리에게 상해를 입힙니다. 제 작년에 제가 차 사고가 크게 나서 하나님 앞에 무조건 회개했습니다. 몸은 멀쩡했지만 사고가 나면 무조건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화살을 당기면 우리는 몸에 병이 오기도 하고, 신체가 잘려나가기도 합니다. 눈이 흐리기도 하고, 이가 부러지거나 상하고 뽑히기도 하는데 다 회감임입니다. 무조건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는 많은 상해를 입게 되는데 하나님이 화살을 쏜 겁니다. 무조건 회개해야 합니다. 귀에 맞으면 귀가 안 들리고, 눈에 맞으면 눈에 백내장이 오고 녹내장이 오고. 우리는 살면서 여러 상해를 당하는데 다 회개가 안되어서 오는 것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눈이 쇠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100세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회개를 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내용들을 다 회개로 만들어내야 됩니다.
14절입니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여기 낳음은 역시 오번역인데 누구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악인은 죄악을 고통스럽게 출산함이여’라는 뜻입니다. 고통스럽게 출산하는 것은 난산입니다.
‘재앙을 베어’ 재앙도 오번역으로 ‘큰 잘못’입니다. 베어는 ‘품고, 임신하고’입니다. 악인은 죄악들을 고통스럽게 출산하고, 큰 잘못들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낳았도다’ 낳았다는 것은 ‘어떤 물건을 만들어내다’의 의미입니다. 악인은 거짓을 막 만들어 냅니다. 악인의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악인은 죄를 짓는 사람, 잘못을 품고 있는 사람, 거짓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사람들은 악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거짓말을 많이 했는데 거짓말하니까 재밌더라구요!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더라구요. 거짓을 막 만들어내요. 거짓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악인입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유황불에 던져진다고 요한계시록에 써있습니다. 거짓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기, 문서위조, 위증 이런 건 다 지옥가는 죄이며 악인들은 거짓을 잘합니다. 무고죄로 남을 고소하고 전부 다 지옥감입니다. 악인들은 거짓된 자들입니다.
15절입니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웅덩이는 동물이나 사람을 빠지게 하는 곳입니다. 웅덩이를 파서 만듭니다.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드디어 사울과 그의 신하들이 다윗을 죽이려 하다가 자기들이 죽게 됩니다. 악인들이 선인들을 괴롭히려 온갖 모략을 세워서 악한 것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은 악인이 빠져 죽게 돼 있습니다. 세상 원리는 자기가 심은 것을 먹게 돼 있습니다. 내가 악을 심으면 악이 나오고 선을 심으면 선이 나와요. 세상은 100% 심는 대로 거두게 돼 있어요. 세상의 원리는 내가 무엇을 심든지 다 그대로 거둡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잘 심는 겁니다. 언젠가는 거두게 돼 있습니다. 악인들은 남을 죽일 웅덩이를 파는데 결국은 자기가 거기에 빠져 죽게 됩니다.
16절입니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재앙은 잘못입니다.
‘그의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포학은 옛날 표현이고 폭력입니다. 악인들은 폭력이 많습니다. 폭력적인 사람은 맘에 나쁜 마음이 있으면 행동이 거칠어지며 폭력을 사용합니다. 미국 영화들이 주로 폭력과 음란물이죠. 요즘 애들이 왜 그렇게 거칩니까? 매일 보는 게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늘 보고 자랍니다. 하도 보고 자라니까 지금은 사람 죽이는 게 뭐 그렇게 큰 죄가 아닙니다. 이런 폭력이 악인의 정점입니다.
12절입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원어는 ‘돌이키지 아니하면’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우리말이지 원어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아직 칼로 우리를 찌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칼을 계속 가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 자신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울과 그의 신하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들이 빨리 악을 멈추고 돌아서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칼을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단명합니다. 때로는 재난으로 장애자가 됩니다. 때로는 질병 가운데 떨어집니다. 때로는 파산합니다. 때로는 가족에게서 버림받습니다. 때로는 사회 밑바닥에 떨어져서 찜질방이나 고시원,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되거나, 때로는 정신이 돌아서 이상한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내리실 때는 그것을 보여주시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칼을 가시다가 치실 때는 우리 삶에 엄청난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 배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지만, 그 전에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는데 회개는 계속, 매일 하는 작업입니다. “하나님 오늘 내가 어떤 걸 잘못했습니까?”하고 매일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과거가 아닙니다. 회개는 매일 하는 것입니다. 왜?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이 칼을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활을 당기면 준비상태입니다. 손만 놓으면 화살이 날아갑니다. 당긴 상태는 심판 직전입니다.
13절입니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아! 좀 무섭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절정입니다. 나이들면 다 죽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나이 먹어서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는 안 죽다가 나이 먹으면 죽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서 죽을 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시 회개하면 안 죽고 연장됩니다.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합니다.
우리 아버님이 지금 살아계십니다. 혈기가 좀 있으신데 혈기의 영 때문에 다리가 부러졌어요. 아버님이 가끔 혈기가 나올 때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회개의 찬송을 하게 하셔서 마음으로 회개하게 하시고, 수명이 또 늘어나고, 또 나아가는 거에요. 하나님은 화가 많이 나면 결국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은 없어요. 가장 강력한 심판은 우리를 죽이는 거에요. 나중에 사울은 죽게 되는데 그의 편도 다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지 않을 때 죽일 도구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래 사는 비결, 축복의 비결은 회개입니다.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이것도 사실은 오번역이고 비약적 번역입니다. 원래 ‘불살’이라는 단어는 없고 그분은 만드시는데 과녁을 맞추는 화살입니다’ 화살은 맞으면 당장은 안 죽고 큰 상해를 입습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상해를 입습니다.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피부가 상하기도 하고 피가 나기도 합니다. 화살이 떠나면 우리에게 상해를 입힙니다. 제 작년에 제가 차 사고가 크게 나서 하나님 앞에 무조건 회개했습니다. 몸은 멀쩡했지만 사고가 나면 무조건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화살을 당기면 우리는 몸에 병이 오기도 하고, 신체가 잘려나가기도 합니다. 눈이 흐리기도 하고, 이가 부러지거나 상하고 뽑히기도 하는데 다 회감임입니다. 무조건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는 많은 상해를 입게 되는데 하나님이 화살을 쏜 겁니다. 무조건 회개해야 합니다. 귀에 맞으면 귀가 안 들리고, 눈에 맞으면 눈에 백내장이 오고 녹내장이 오고. 우리는 살면서 여러 상해를 당하는데 다 회개가 안되어서 오는 것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눈이 쇠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100세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회개를 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내용들을 다 회개로 만들어내야 됩니다.
14절입니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여기 낳음은 역시 오번역인데 누구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악인은 죄악을 고통스럽게 출산함이여’라는 뜻입니다. 고통스럽게 출산하는 것은 난산입니다.
‘재앙을 베어’ 재앙도 오번역으로 ‘큰 잘못’입니다. 베어는 ‘품고, 임신하고’입니다. 악인은 죄악들을 고통스럽게 출산하고, 큰 잘못들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낳았도다’ 낳았다는 것은 ‘어떤 물건을 만들어내다’의 의미입니다. 악인은 거짓을 막 만들어 냅니다. 악인의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악인은 죄를 짓는 사람, 잘못을 품고 있는 사람, 거짓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사람들은 악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거짓말을 많이 했는데 거짓말하니까 재밌더라구요!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더라구요. 거짓을 막 만들어내요. 거짓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악인입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유황불에 던져진다고 요한계시록에 써있습니다. 거짓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기, 문서위조, 위증 이런 건 다 지옥가는 죄이며 악인들은 거짓을 잘합니다. 무고죄로 남을 고소하고 전부 다 지옥감입니다. 악인들은 거짓된 자들입니다.
15절입니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웅덩이는 동물이나 사람을 빠지게 하는 곳입니다. 웅덩이를 파서 만듭니다.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드디어 사울과 그의 신하들이 다윗을 죽이려 하다가 자기들이 죽게 됩니다. 악인들이 선인들을 괴롭히려 온갖 모략을 세워서 악한 것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은 악인이 빠져 죽게 돼 있습니다. 세상 원리는 자기가 심은 것을 먹게 돼 있습니다. 내가 악을 심으면 악이 나오고 선을 심으면 선이 나와요. 세상은 100% 심는 대로 거두게 돼 있어요. 세상의 원리는 내가 무엇을 심든지 다 그대로 거둡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잘 심는 겁니다. 언젠가는 거두게 돼 있습니다. 악인들은 남을 죽일 웅덩이를 파는데 결국은 자기가 거기에 빠져 죽게 됩니다.
16절입니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재앙은 잘못입니다.
‘그의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포학은 옛날 표현이고 폭력입니다. 악인들은 폭력이 많습니다. 폭력적인 사람은 맘에 나쁜 마음이 있으면 행동이 거칠어지며 폭력을 사용합니다. 미국 영화들이 주로 폭력과 음란물이죠. 요즘 애들이 왜 그렇게 거칩니까? 매일 보는 게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늘 보고 자랍니다. 하도 보고 자라니까 지금은 사람 죽이는 게 뭐 그렇게 큰 죄가 아닙니다. 이런 폭력이 악인의 정점입니다.
남자는 폭력배, 여자는 매춘부, 이렇게 폭력배와 매춘부는 악의 정점이에요. 그래서 폭력배와 매춘부는 성전에서 커트시키는 거에요! 제가 컬럼에서 ‘폭력배와 매춘부는 받아줄 수 없다’라고 썼습니다. 폭력배는 대개 보면 순한데, ‘악인은 악을 벴다’고 한 표현처럼 언젠가 그 본성이 폭력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해해서 폭력배가 항상 악하게 구는 줄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보면, 대부분 순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것이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은 잘못을 갖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그것을 발동하는데, 그의 잘못이 돌아오고 자기의 폭력이 자기 정수리에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17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이것도 오번역인데 감사가 아니라 ‘찬양함이여’입니다. 다윗이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산 것을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내용들이 많습니다. 형통도 감사하고, 출생, 결혼, 건강도 감사하지만, 다윗이 감사하는 건 ‘내가 의롭게 산 것을 정말 감사합니다. 저들은 그렇게 못 살았잖아요. 저들도 회개하면 되지만 저들은 지금 회개 못 하잖아요. 제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게 너무 감사해요'라는 본질적인 감사입니다.
17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이것도 오번역인데 감사가 아니라 ‘찬양함이여’입니다. 다윗이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산 것을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내용들이 많습니다. 형통도 감사하고, 출생, 결혼, 건강도 감사하지만, 다윗이 감사하는 건 ‘내가 의롭게 산 것을 정말 감사합니다. 저들은 그렇게 못 살았잖아요. 저들도 회개하면 되지만 저들은 지금 회개 못 하잖아요. 제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게 너무 감사해요'라는 본질적인 감사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구원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천국을 감사해요” 그러나 다윗은 의로운 길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됩니까?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의 본질은 뭡니끼?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데 찌드게누(Tsidkenu), ‘찌드게누’가 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이름이 많습니다. 이레, 라파, 샬롬, 삼마,닛시, 엘로힘 등 많은데 여호와 ‘찌드게누’는 의의 하나님입니다. 의가 하나님으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내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지존은 ‘가장 높으신, 지극히 존귀하신’입니다. 찬양은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게 찬양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나에게 이룬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게 찬양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향해서 ‘참 예쁘다, 영화배우 같아’라고 말하는 게 찬양입니다.
의의 본질은 뭡니끼?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데 찌드게누(Tsidkenu), ‘찌드게누’가 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이름이 많습니다. 이레, 라파, 샬롬, 삼마,닛시, 엘로힘 등 많은데 여호와 ‘찌드게누’는 의의 하나님입니다. 의가 하나님으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내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지존은 ‘가장 높으신, 지극히 존귀하신’입니다. 찬양은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게 찬양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나에게 이룬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게 찬양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향해서 ‘참 예쁘다, 영화배우 같아’라고 말하는 게 찬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속성을 아뢰는 게 찬양입니다. 원어는 ‘찬양을 노래할 것입니다’라고 돼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할께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만이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걸 해주셨어’라고 말하는 것도 찬양입니다. 시와 찬미와 노래로 화답하며 라고 할 때 노래는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신걸 사람들과 나누는 거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해주셨어’라는 말이 찬양인데 여기에 곡조를 넣으면 찬송가가 됩니다. 찬송가는 찬양에 곡조를 넣은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시에 대한 곡조를 넣습니다. 다윗이 이래서 실제로 성가대를 조직합니다. 중세시대 때는 지금과는 다르지만 음을 넣어서 기도문을 외웠습니다. 한 음을 쭉 끌면서 말을 붙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찬양을 합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작곡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맞춰서 음을 냈습니다. 다윗은 지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시작할 때는 박해 받는 것 때문에 힘들어 했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면 노래하는 자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삶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땅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삶이 늘 고통스러운데 다윗처럼 기도가 정확히 들어가면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힘들었는데 기도가 끝나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항상 가볍게 삽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모든 무거운 마음들은 아직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토해지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다 토해지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찬양을 노래하리이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인생 가운데서 매일 찬양하며 살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찬양은 반드시 기도가 전제 되어야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 만난 다음에 내 마음에 찬양이 올라와서 너무 감사하고 기쁘고 즐거워서 술 취한 사람이 흥얼대듯 드디어 내 마음에 노래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충만함에 도달되었습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충만함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생활이 몸에 베어야 됩니다. 언제 기도합니까? 기도는 밤에 합니다. 밤에 남들 잘 때 그때 하는 기도가 가장 좋은 겁니다. 새벽기도 안해도 됩니다. 우리는 밤새 기도해도 안 피곤합니다. 저는 뜬눈으로 밤샌 적이 엄청 많습니다. 밤새 기도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그냥 맨날 '룰루랄라'하고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도 없는 것 같습니다. 밤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밤새 기도합니다. 밤새 중보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다시 또 즐거움이 임합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늘 찬양이 나옵니다. 다윗이 극심한 위기가 와도 노래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기도입니다. 밤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저절로 막 나옵니다. 밤에 계속 기도하고 잠을 자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밤에는 회개합니다. 낮에는 은혜받아 사역하고 밤에는 기도하고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셨는데, 남들이 자는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낮에는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에 기도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다 일하고 밤에 기도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삶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땅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삶이 늘 고통스러운데 다윗처럼 기도가 정확히 들어가면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힘들었는데 기도가 끝나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항상 가볍게 삽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모든 무거운 마음들은 아직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토해지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다 토해지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찬양을 노래하리이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인생 가운데서 매일 찬양하며 살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찬양은 반드시 기도가 전제 되어야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 만난 다음에 내 마음에 찬양이 올라와서 너무 감사하고 기쁘고 즐거워서 술 취한 사람이 흥얼대듯 드디어 내 마음에 노래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충만함에 도달되었습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충만함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생활이 몸에 베어야 됩니다. 언제 기도합니까? 기도는 밤에 합니다. 밤에 남들 잘 때 그때 하는 기도가 가장 좋은 겁니다. 새벽기도 안해도 됩니다. 우리는 밤새 기도해도 안 피곤합니다. 저는 뜬눈으로 밤샌 적이 엄청 많습니다. 밤새 기도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그냥 맨날 '룰루랄라'하고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도 없는 것 같습니다. 밤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밤새 기도합니다. 밤새 중보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다시 또 즐거움이 임합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늘 찬양이 나옵니다. 다윗이 극심한 위기가 와도 노래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기도입니다. 밤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저절로 막 나옵니다. 밤에 계속 기도하고 잠을 자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밤에는 회개합니다. 낮에는 은혜받아 사역하고 밤에는 기도하고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셨는데, 남들이 자는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낮에는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에 기도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다 일하고 밤에 기도합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il.com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