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시편 강해 9장 [영적전투의 승리비결]
시편9장
[영적전투의 승리비결]
1.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0절까지)
시편 9장 역시 다윗의 시인데 전쟁에서 승리한 후 드린 기도입니다. 다윗의 시가 주로 쓰인 이유는 다윗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정확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정확하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과 가장 흡사한 사람이었고, 또한 성령의 감동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9장 역시 다윗의 시인데 전쟁에서 승리한 후 드린 기도입니다. 다윗의 시가 주로 쓰인 이유는 다윗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정확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정확하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과 가장 흡사한 사람이었고, 또한 성령의 감동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10년 넘게 괴롭힌 사울이 죽었을 때 아픔으로 우는 사람, 압살롬이란 아들이 반역할 때 아들의 죽음을 원치 않은 사람, 완전히 예수님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형상을 갖춘 다윗이 기도할 때 성령님의 감동이 항상 임합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너무 정확히 일치되니까 이 기도가 나중에 노래로 부르게 되고, 시편은 기도이면서 동시에 노래가 됩니다.
이 9장도 다윗이 암몬과 싸운 전쟁이지만, 사실은 영적 전쟁이고 이 전쟁을 어떻게 기도로 묘사하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1절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니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다윗은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 감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 울분이나 고통, 원망으로 시작할 때가 있는데 이미 영적 전쟁에서 약간은 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감사할 일과 불평할 일들이 있기 마련인데 똑같은 상황일 때, 어떤 사람은 아주 재밌게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힘들어합니다.
군 생활을 비유로 들자면 똑같은 상황에서 아주 재밌게 생활하는 사람을 보고 “넌 군대 체질이다. 말뚝박어라”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람 사는 상황은 거의 다르지 않은데 어떤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더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영적 전투의 세계에서 전심으로 감사한다는 승리의 포문을 엽니다. 감사는 승리를 여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1절부터 다윗은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원래는 주의 이름에 대한 찬양을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찬양입니다. 찬양은 힘든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올려드리는 수단입니다. 곡조가 없더라도 “하나님, 나를 이렇게 건져 주셨네요”라고 감사를 올리는 것이 찬양인데, 우리가 찬양할 때 이미 마귀를 어느 정도 제압하는 것입니다. 찬송가는 찬양의 진수들인데, 찬송가를 부르면 우리의 생각이 많이 정화되고 성령님의 순수한 빛으로 차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몰입합니다.
3절입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우리는 원수라고 하면 나를 괴롭히는 사람, 물질적인 어려움 또는 힘든 환경을 떠올리지만, 사실 원수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우리 안에 있는 원수 마귀, 귀신이 약화되는데, 찬송을 많이 부르면 정신이 좀 돌아옵니다.
다윗이 형상적으로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사실 모든 전투의 핵심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 전투가 항상 일어나는데, 이유는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고, 내 영이 있고, 귀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마귀의 팔입니다. 지네의 몸통과 다리들같이 마귀라는 몸체에 수억 개의 팔이 있습니다. 그 팔인 귀신이 우리 안에 와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귀신과 싸우는 것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갔다는 것은 사실 마귀는 천사니까 몸에는 못 들어가지만, 귀신이 들어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마귀와 귀신은 중의적으로 쓰입니다. 사실 마귀와 귀신은 다를 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싸워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귀신과 싸우는데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나 가난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귀신입니다. 이 원수가 드디어 물러가는데 주 앞에서 넘어진 것입니다.
4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심판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내 안에 나와 하나님과 귀신이 있는데, 내가 의에 편에 있을 때 귀신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귀신한테 ‘나가라!’ 명한다고 나가는 게 아니라, 내가 성령님 편에 있을 때 나의 의와 송사에 대해서 주님 편에 있을 때, 주님이 드디어 원수인 어둠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이방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름을 지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안에 들어오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내가 범죄하고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안 하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살짝 지우시다가 그래도 안 한다면 내 이름을 지우십니다.
믿는 자가 아닌 이방인들의 이름은 지우는 게 아닙니다. 원어에는 ‘이방인의 이름을 던져 버렸다’입니다. 이것은 어둠의 힘에 대한 완전한 약화를 상징합니다. 나한테 역사한 어둠이 드디어 약화되어서 이름조차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름이란 존재에 대한 형상화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마귀의 이름도 마귀라는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어도 이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사람에 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이름이 던져졌다는 것은 마귀라는 존재가 완전히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성읍은 성(city)이고 원수가 있는 성을 말합니다. 원래 어둠은 우리 안에 거할 때 집에 거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방들이 수천, 수만 개가 있는데 그 안에 어둠들이 집을 짓고 삽니다. 몇 마리일까요? 사실은 모릅니다. 어둠에 대해서 한 마리가 실제 한 마리가 아닙니다. 한 마리가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의 경우, 로마군이 원래 한 부대가 육천 명으로 육천 마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둠의 영을 쫓아낼 때 한 마리가 나간다고 할 때,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한 마리에 딸린 군단이 같이 나가는 것입니다. 어둠의 영들이 우리 안에서 머리나 배, 어깨 등 신체의 부분들을 쥐게 되면 이 부분들에서 나중에 질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영들이 쫓겨나면 영의 세계에서 어둠의 영들이 자리 잡고 있던 성이 멸절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외적으로 암몬과 싸워 승리한 것을 노래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내적인 세계를 형상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고, 당시에 상황적으로 이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내적인 영적인 세계를 도해한 것이지, 단순히 그냥 다윗이 누구를 이긴 것으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적인 영적인 세계에서의 승리를 말합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어둠이 나갈수록 내 안의 하나님은 강해집니다. 어떻게 신앙이 강해질 수 있을까요? 주님이 강해져서 어둠이 나가면 주님이 나에게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영력은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성령님께 순종을 많이 할수록 강해집니다. 내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힘이 강해지신 것이지 인간의 영은 똑같습니다.
영력은 또 어떻게 강해질 수 있을까요? 지은 죄를 많이 회개할수록 우리 영의 힘은 강해집니다. 죄가 있으면 귀신이 강해지는데, 죄가 사해지면 성령님이 강해지기 때문에 영력을 키우는 방법은 죄를 많이 사함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 생활을 많이 하면 성령님이 강해져서 내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고, 성령의 지배권이 나를 완전히 덮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언제 이루어질까요? 영의 나이가 서른 살 정도 되면 성령님의 완전 지배에 들어갑니다. 누굴까요? 모세나 엘리야같이 겉보기에 예수님과 방불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언제 받습니까? 허리나 어깨 정도의 지배를 당하는 영의 나이가 스무 살 정도 되면 성령님의 지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성령님이 나에게 보혜사가 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데, 보혜사가 되면 성령님이 내 영에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신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불순종하면 떠나가십니다. 구원 이탈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는 그분이 나에게 자리를 잡아서 내가 항거할 수 없는 단계가 오는데 영의 나이 스무 살 때부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20세부터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때부터는 성령님이 나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보혜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성령님은 동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승천한 다음에 또 다른 보혜사가 오셨는데, 그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임하셨는데 임한 성령님이 내게 항상 보혜사가 되는 게 아니라 내 영 안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구원 이탈이 거의 안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이론이 똑같은데 언제 이탈되느냐? 자리를 안 잡을 때는 이탈이 가능합니다. 이게 제가 갖고 있는 구원관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한번 구원이 영원하다’라고 하는데, 영이 어릴 때는 아닙니다. 하지만 영이 장성해지면 이탈이 안 되는 단계가 옵니다. 왜? 자리를 잡았고 원수가 많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며 멸망시키는 어둠이 나가면 드디어 그다음 단계부터는 신앙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리라’ 한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되시면 그다음부터는 구원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왜 많이 다루지 않을까요? 이렇게 구원이 이탈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의 연령이 다 다른데 영의 연령이 성장 되어서 어느 궤도에 도달하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앉을 단계가 옵니다. 다윗이 이것을 노래합니다.
8절입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 편이십니다.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처럼 공정하신 분은 안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 편이시고, 우리는 내가 하나님 편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내 편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이기 때문에 공정하십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오 환란 때의 요새이시로다’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 환란인데, 마귀의 공격으로 고통이 올 때 내가 하나님께 피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영적인 고통이 있을 때 시험에 빠지면 마귀와 동화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으로 ‘이혼해야지 못 살겠어’하는 생각이 들 때, ‘그래’ 해버리면 시험입니다. 그런데 ‘안 돼, 하나님 말씀으로 안 됩니다’ 하면 이것이 요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새라는 말을 이해할 때 ‘어려움이 심해.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오, 요새이십니다’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단순하게 내가 어렵다고 도와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새는 내가 마귀 공격을 피해 하나님 안에 있는 자리로 숨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를 붙잡아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안 계시면 우리에겐 요새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요새가 있는 것입니다. 요새는 마귀의 공격인 영적인 환난으로부터 피할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주님의 이름이 있는 백성들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주님을 찾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큰 승리를 주관합니다. 영적 싸움은 24시간 존재합니다. 우리는 매일 영적 싸움을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한쪽에는 귀신의 생각, 한쪽에는 내 생각, 한쪽에는 성령님의 생각이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내가 자꾸 주님께 나아가는 과정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승리의 비결, 내가 예수님께 자꾸 영적으로 나아가서 어둠이 주는 생각들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예루살렘, 예루살렘 성전, 모리아 산 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통치의 가장 본거지, 수도를 말합니다. ‘시온에 계신 여호와’ 지금 하나님이 내 안에 자리를 잡아서 통치하신다는 영적인 형상화입니다. 대한민국은 서울이 수도이고 서울에 청와대가 있습니다. 통치권자가 드디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를 통치하는 그분이 시온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12절입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가난은 육체적인 가난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가난을 말합니다. 어둠이 공격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기는데 그것이 가난입니다. 성경에서 가난은 하나님에 대한 필요, 찾음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시온에서 통치하시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인지가 안 될 때 다윗은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힘들어해야 하느냐? 우리는 돈이 없어서 힘들어요. 몸이 아파서 힘들어요. 맞아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분명히 통치하는데 그것이 안 보여서 힘들어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느껴지지 않고, 마귀가 나를 괴롭힐 때, 하나님이 나에게 영향을 못 줄 때, 힘들어하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쫓겨 다니거나 죽을 위험에 처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인식 안 될 때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며, 하나님은 다윗의 이 모습에 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인식이 안 될 때, 통치가 느껴지지 않을 때 힘든 상태가 가난입니다. 다윗은 가난을 느낀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는 것은 죽음이나 고통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불신자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신자는 성령님이 안 계시고 자기 영과 귀신만 있는 이중인격자이고, 신자는 삼중 인격자로 하나님이 계시고 내 영과 귀신이 있기 때문에 더 갈등이 많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사망은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통에서 나를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과 연결시켜 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내 안에 계셔’라고 말하는데 그건 말뿐입니다. 옛날에 옥상에 안테나를 달고 TV를 보던 시절, 화면이 지지직 아무 것도 안 보여요.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통치가 안되면 사실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지 않는 것은 죽음인 것입니다.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율법과 사망의 법”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 사망인데, 영적으로 이 사망이 쉽게 옵니다. ‘하나님 믿는데요’ 아니에요. 통치가 아니면 사망이 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지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게 죄고 반항이고 불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녀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바울이 깨닫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반항적이고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망입니다!
14절입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라’ 오번역으로 딸 시온이 아니라 ‘시온의 딸’인데, ‘구원받은 자가 통치를 받아서 오는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때 ‘시온의 딸아’ 하는 말이 나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마귀 통치는 사망입니다. 사망에서 건짐받고 하나님과 늘 좋은 관계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느끼면 시온의 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15절입니다.
‘이방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외적인 공격자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방’은 외적인 세계를 말하고 ‘원수’는 내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외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공격자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 다시 말에 자기 꾀에 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공격자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서 원수 맺고, 미워하는 악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환경과는 싸울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게 돼 있고, 자기 발에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여기에서 악인은 원수가 아니라 외적인 공격자를 말합니다. 악인은 스스로 얽혀서 다 제풀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힉가욘 셀라’ 힉가욘은 음악용어인데 '중지, 쉼, 반복'이란 의미이고 셀라는 '묵상'이란 뜻입니다.
17절입니다.
‘악인들이 스올로 들어감이여’ 구약에서 스올은 무덤이나 지옥을 말하는데, 원래는 지옥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스올에 들어갔다’라고 할 때는 무덤이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지옥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형상화된 일반 내용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인들은 구원의 기쁨으로 노래하며 사는 것이고, 귀신의 말에 순종하는 악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다윗은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이방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름을 지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안에 들어오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내가 범죄하고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안 하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살짝 지우시다가 그래도 안 한다면 내 이름을 지우십니다.
믿는 자가 아닌 이방인들의 이름은 지우는 게 아닙니다. 원어에는 ‘이방인의 이름을 던져 버렸다’입니다. 이것은 어둠의 힘에 대한 완전한 약화를 상징합니다. 나한테 역사한 어둠이 드디어 약화되어서 이름조차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름이란 존재에 대한 형상화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마귀의 이름도 마귀라는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어도 이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사람에 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이름이 던져졌다는 것은 마귀라는 존재가 완전히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성읍은 성(city)이고 원수가 있는 성을 말합니다. 원래 어둠은 우리 안에 거할 때 집에 거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방들이 수천, 수만 개가 있는데 그 안에 어둠들이 집을 짓고 삽니다. 몇 마리일까요? 사실은 모릅니다. 어둠에 대해서 한 마리가 실제 한 마리가 아닙니다. 한 마리가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의 경우, 로마군이 원래 한 부대가 육천 명으로 육천 마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둠의 영을 쫓아낼 때 한 마리가 나간다고 할 때,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한 마리에 딸린 군단이 같이 나가는 것입니다. 어둠의 영들이 우리 안에서 머리나 배, 어깨 등 신체의 부분들을 쥐게 되면 이 부분들에서 나중에 질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영들이 쫓겨나면 영의 세계에서 어둠의 영들이 자리 잡고 있던 성이 멸절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외적으로 암몬과 싸워 승리한 것을 노래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내적인 세계를 형상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고, 당시에 상황적으로 이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내적인 영적인 세계를 도해한 것이지, 단순히 그냥 다윗이 누구를 이긴 것으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적인 영적인 세계에서의 승리를 말합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어둠이 나갈수록 내 안의 하나님은 강해집니다. 어떻게 신앙이 강해질 수 있을까요? 주님이 강해져서 어둠이 나가면 주님이 나에게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영력은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성령님께 순종을 많이 할수록 강해집니다. 내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힘이 강해지신 것이지 인간의 영은 똑같습니다.
영력은 또 어떻게 강해질 수 있을까요? 지은 죄를 많이 회개할수록 우리 영의 힘은 강해집니다. 죄가 있으면 귀신이 강해지는데, 죄가 사해지면 성령님이 강해지기 때문에 영력을 키우는 방법은 죄를 많이 사함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 생활을 많이 하면 성령님이 강해져서 내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고, 성령의 지배권이 나를 완전히 덮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언제 이루어질까요? 영의 나이가 서른 살 정도 되면 성령님의 완전 지배에 들어갑니다. 누굴까요? 모세나 엘리야같이 겉보기에 예수님과 방불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언제 받습니까? 허리나 어깨 정도의 지배를 당하는 영의 나이가 스무 살 정도 되면 성령님의 지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성령님이 나에게 보혜사가 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데, 보혜사가 되면 성령님이 내 영에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신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불순종하면 떠나가십니다. 구원 이탈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는 그분이 나에게 자리를 잡아서 내가 항거할 수 없는 단계가 오는데 영의 나이 스무 살 때부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20세부터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때부터는 성령님이 나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보혜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성령님은 동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승천한 다음에 또 다른 보혜사가 오셨는데, 그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임하셨는데 임한 성령님이 내게 항상 보혜사가 되는 게 아니라 내 영 안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구원 이탈이 거의 안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이론이 똑같은데 언제 이탈되느냐? 자리를 안 잡을 때는 이탈이 가능합니다. 이게 제가 갖고 있는 구원관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한번 구원이 영원하다’라고 하는데, 영이 어릴 때는 아닙니다. 하지만 영이 장성해지면 이탈이 안 되는 단계가 옵니다. 왜? 자리를 잡았고 원수가 많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며 멸망시키는 어둠이 나가면 드디어 그다음 단계부터는 신앙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리라’ 한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되시면 그다음부터는 구원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왜 많이 다루지 않을까요? 이렇게 구원이 이탈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의 연령이 다 다른데 영의 연령이 성장 되어서 어느 궤도에 도달하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앉을 단계가 옵니다. 다윗이 이것을 노래합니다.
8절입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 편이십니다.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처럼 공정하신 분은 안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 편이시고, 우리는 내가 하나님 편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내 편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이기 때문에 공정하십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오 환란 때의 요새이시로다’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 환란인데, 마귀의 공격으로 고통이 올 때 내가 하나님께 피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영적인 고통이 있을 때 시험에 빠지면 마귀와 동화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으로 ‘이혼해야지 못 살겠어’하는 생각이 들 때, ‘그래’ 해버리면 시험입니다. 그런데 ‘안 돼, 하나님 말씀으로 안 됩니다’ 하면 이것이 요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새라는 말을 이해할 때 ‘어려움이 심해.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오, 요새이십니다’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단순하게 내가 어렵다고 도와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새는 내가 마귀 공격을 피해 하나님 안에 있는 자리로 숨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를 붙잡아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안 계시면 우리에겐 요새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요새가 있는 것입니다. 요새는 마귀의 공격인 영적인 환난으로부터 피할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주님의 이름이 있는 백성들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주님을 찾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큰 승리를 주관합니다. 영적 싸움은 24시간 존재합니다. 우리는 매일 영적 싸움을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한쪽에는 귀신의 생각, 한쪽에는 내 생각, 한쪽에는 성령님의 생각이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내가 자꾸 주님께 나아가는 과정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승리의 비결, 내가 예수님께 자꾸 영적으로 나아가서 어둠이 주는 생각들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예루살렘, 예루살렘 성전, 모리아 산 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통치의 가장 본거지, 수도를 말합니다. ‘시온에 계신 여호와’ 지금 하나님이 내 안에 자리를 잡아서 통치하신다는 영적인 형상화입니다. 대한민국은 서울이 수도이고 서울에 청와대가 있습니다. 통치권자가 드디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를 통치하는 그분이 시온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12절입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가난은 육체적인 가난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가난을 말합니다. 어둠이 공격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기는데 그것이 가난입니다. 성경에서 가난은 하나님에 대한 필요, 찾음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시온에서 통치하시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인지가 안 될 때 다윗은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힘들어해야 하느냐? 우리는 돈이 없어서 힘들어요. 몸이 아파서 힘들어요. 맞아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분명히 통치하는데 그것이 안 보여서 힘들어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느껴지지 않고, 마귀가 나를 괴롭힐 때, 하나님이 나에게 영향을 못 줄 때, 힘들어하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쫓겨 다니거나 죽을 위험에 처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인식 안 될 때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며, 하나님은 다윗의 이 모습에 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인식이 안 될 때, 통치가 느껴지지 않을 때 힘든 상태가 가난입니다. 다윗은 가난을 느낀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는 것은 죽음이나 고통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불신자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신자는 성령님이 안 계시고 자기 영과 귀신만 있는 이중인격자이고, 신자는 삼중 인격자로 하나님이 계시고 내 영과 귀신이 있기 때문에 더 갈등이 많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사망은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통에서 나를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과 연결시켜 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내 안에 계셔’라고 말하는데 그건 말뿐입니다. 옛날에 옥상에 안테나를 달고 TV를 보던 시절, 화면이 지지직 아무 것도 안 보여요.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통치가 안되면 사실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지 않는 것은 죽음인 것입니다.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율법과 사망의 법”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 사망인데, 영적으로 이 사망이 쉽게 옵니다. ‘하나님 믿는데요’ 아니에요. 통치가 아니면 사망이 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지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게 죄고 반항이고 불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녀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바울이 깨닫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반항적이고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망입니다!
14절입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라’ 오번역으로 딸 시온이 아니라 ‘시온의 딸’인데, ‘구원받은 자가 통치를 받아서 오는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때 ‘시온의 딸아’ 하는 말이 나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마귀 통치는 사망입니다. 사망에서 건짐받고 하나님과 늘 좋은 관계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느끼면 시온의 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15절입니다.
‘이방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외적인 공격자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방’은 외적인 세계를 말하고 ‘원수’는 내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외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공격자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 다시 말에 자기 꾀에 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공격자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서 원수 맺고, 미워하는 악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환경과는 싸울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게 돼 있고, 자기 발에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여기에서 악인은 원수가 아니라 외적인 공격자를 말합니다. 악인은 스스로 얽혀서 다 제풀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힉가욘 셀라’ 힉가욘은 음악용어인데 '중지, 쉼, 반복'이란 의미이고 셀라는 '묵상'이란 뜻입니다.
17절입니다.
‘악인들이 스올로 들어감이여’ 구약에서 스올은 무덤이나 지옥을 말하는데, 원래는 지옥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스올에 들어갔다’라고 할 때는 무덤이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지옥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형상화된 일반 내용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인들은 구원의 기쁨으로 노래하며 사는 것이고, 귀신의 말에 순종하는 악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다윗은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나라들이 그리 하리로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자는 다 지옥간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에서 가난은 외적 가난이 아닙니다. 궁핍은 필요한 것이 많은 상태이고, 가난은 가진 게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늘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가난한 자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하나님에 대해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하나님은 일어날 수 없는데 여기에서 ‘일어나사’는 하나님께서 액션을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나라들이 주의 앞에서 심판을 받게하소서’ 일반적인 인생들은 승리를 얻지 못합니다. 왜? 영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생들은 악인과 원수들을 따라가고 하나님 편에 오지 않기 때문에 다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나라들이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이방 나라들은 내부적인 귀신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뿐이다는’ 것은 인생무상이란 것입니다. 인생 동안 추구한 모든 욕망과 욕구, 성취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는 자들은 구원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스올에 빠지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받는데, 마귀의 공격을 받고 지배당하는 일반 사람들은 물거품 인생을 살 뿐입니다. 인생은 물거품일 불과합니다. 솔로몬도 인생은 허무하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순간들은 인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그 순간의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행위록에 다 기록하셔서 상급을 내려 주시고, 반대로 지금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귀를 따라 산 인생은 인생무상으로 끝나버립니다.
홍콩은 도교가 많은데 98%됩니다. 홍콩 사람들은 풍수지리라든가 노장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무 꿈도 비전도 없이 그냥 ‘오늘 잘 살면 된다’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질병이 엄청 많고 아무 생각 없이 허무하고 사는 낙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어둠의 지배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둠의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소망도 없고, 꿈도 없고, 낙도 없고, 희망도 없고. 인생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스올로 갑니다. 다윗은 자기를 인생뿐인 사람과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내가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구도 안에서 내가 하나님께로 가는 구도로 바뀌는 것이 기도입니다.
18절입니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에서 가난은 외적 가난이 아닙니다. 궁핍은 필요한 것이 많은 상태이고, 가난은 가진 게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늘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가난한 자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하나님에 대해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하나님은 일어날 수 없는데 여기에서 ‘일어나사’는 하나님께서 액션을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나라들이 주의 앞에서 심판을 받게하소서’ 일반적인 인생들은 승리를 얻지 못합니다. 왜? 영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생들은 악인과 원수들을 따라가고 하나님 편에 오지 않기 때문에 다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나라들이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이방 나라들은 내부적인 귀신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뿐이다는’ 것은 인생무상이란 것입니다. 인생 동안 추구한 모든 욕망과 욕구, 성취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는 자들은 구원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스올에 빠지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받는데, 마귀의 공격을 받고 지배당하는 일반 사람들은 물거품 인생을 살 뿐입니다. 인생은 물거품일 불과합니다. 솔로몬도 인생은 허무하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순간들은 인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그 순간의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행위록에 다 기록하셔서 상급을 내려 주시고, 반대로 지금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귀를 따라 산 인생은 인생무상으로 끝나버립니다.
홍콩은 도교가 많은데 98%됩니다. 홍콩 사람들은 풍수지리라든가 노장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무 꿈도 비전도 없이 그냥 ‘오늘 잘 살면 된다’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질병이 엄청 많고 아무 생각 없이 허무하고 사는 낙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어둠의 지배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둠의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소망도 없고, 꿈도 없고, 낙도 없고, 희망도 없고. 인생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스올로 갑니다. 다윗은 자기를 인생뿐인 사람과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내가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구도 안에서 내가 하나님께로 가는 구도로 바뀌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도와주세요’하면 안됩니다. 이건 기도 아닙니다. 기도는 다윗처럼 내가 하나님이란 존재 앞에 필요해서 가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안 하면서 자꾸 ‘임대료 낼 수 있게 도와 주세요 ~부족하고 필요합니다’ 라고 간구합니다. 기도는 영적으로 마귀를 때려잡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건데 이거 안 되면 기도 안 한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에서 항상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둠은 물러가게 돼 있어요.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의 기도를 본받아서 우리도 영적으로 승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kck43334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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