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시편 강해 8장 [환경지배의 능력]

 
시편 8장 

[환경지배의 능력]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9절까지)


시편 8편 역시 다윗의 시인데, 다윗이 굉장히 흥분된 상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흥분될 때가 있습니다. 주먹이 쥐어지고 손이 막 올라가고 하나님께 탄성이 나오고 감정이 고조될 때나온 시입니다. 기도 중에 손이 올라갈 뿐 아니라 또 마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된 것처럼

선포하며 기도하기도 하는데, 영적인 흥분상태로 성령의 감동에 이끌릴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윗은 지금 영적 감정이 고조되어 원수에게 쫓기면서 하나님께 탄원하던 때의 기도와는 다르게 여기에서는 거의 처음부터 선포하는 식으로 나갑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적으로 번역을 아주 멋있게 한 것입니다. 사실 반 정도는 번역자의 감동이 들어갔는데, 원어는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너무나 위대하시네요’ 그런 의미인데 번역자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시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사실은 ‘덮었다’는 것은 오번역이고, 원어는 ‘주의 영광이 하늘 위에 높습니다’의 의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 가운데 있으면서 이를 표현할 때 ‘크다’라고 하지 않고 ‘높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상당한 오번역입니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입니다. 성경에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는 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구원받고 얼마 안 된 상태를 말하는데 구원에 도달됐지만 영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어려서 젖을 먹는 단계인데, 젖은 보통 태어나서 1년에서 3년 사이에 먹습니다. 영적으로 젖먹이는 1년에서 3년, 어린아이는 3년에서 7년으로 영적인 나이를 잡
을 수 있습니다. 원어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 능력이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흥분한 이유는 ‘내가 영적으로 아주 훌륭하게 됐어요’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와 보니까 영적인 어린아이의 입에도 영적인 능력이 있네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어린아이는 아직 영적으로 미숙하니까 죄짓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영의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평가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영적으로 청년이 되면 머리가 돌아가서 ‘내가 말이야!’ 하면서 어린아이를 우습게 보면서 하나님께 반항적으로 됩니다. 그러면 힘이 없게 됩니다.

영의 세계 ‘power’는 입에 있는데 이빨에 있습니다. 영의 세계에서 이빨이 부러진 것은 힘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오래하고 목사라 할지라도 이빨이 부러지면 영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래 믿어도, 영적인 청장년기에 있더라도 영력은 햇수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으면 영력이 있어서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신앙생활 오래하고 수백 명을 인도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이빨 다 빠져버립니다. 영력이 없어서 남들을 구원하고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얘기 때 너무 이쁜데 좀 크면 미운 7살이라고 합니다. 뭘까요? 관계가 안 좋아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세계에서 시간이 지나면 영은 자라고 장성해지지만, 신앙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연수가 아니라 현재 내가 예수님께 순응적인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처음에는 잘 지내다가 나중에 싸우고 멀어지면 관계가 나빠집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 믿을 때 감격해하며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때는 엄청난 ‘power’가 있어서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이 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래 믿어도 기도가 응답이 잘 안 되는데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연륜이 아니라 현재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관계인데 믿음 안에,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 힘이 있어서 주의 대적들과 대항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대적은 마귀입니다. 우리 입에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나가는데, 그것이 기도이고 말씀이며 찬양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마귀와 대적하는 단계에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오래 믿어도 내가 마귀와 한통속이 되면 그때는 끝난 것입니다. 마귀와 한뜻 되는 게 시험이고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것이 항상 존재합니다. 사실 우리 
신앙은 하루 신앙입니다. 저는 ‘신앙의 단위는 하루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내일 내가 타락할지, 하나님과 원수가 될지 보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오늘 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전투하며 신앙생활 하다 보면 나중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탄기가 옵니다.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다윗이 지금 흥분한 상태인데,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는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는 마귀의 팔인 귀신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고통을 주는 이 존재가 잠잠해지면 우리는 흥분되며 기쁨이 충만해지고 살맛이 납니다. 그런데 보복자와 원수가 내 안에 활성화되면 사는 게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지금 다윗이 보는 것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조차 영적인 흥분이 가능한데, 그것은 입술의 권세로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기가 되면 원수를 제압하기가 더 쉽겠지만 젖먹이 단계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면 얼마든지 원수를 이기고 흥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어릴 때부터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어릴 때 사자의 입을 막고, 곰을 막았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에 맹수가 없지만 다윗 때는 있었습니다. 나중에 가나안 땅은 점점 말라서 사막화되었지만, 다윗 때는 비옥하고 숲이 우거진 좋은 땅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신앙이 좋아서 맹수들을 막았고, 갑옷이 커서 맞지 않았는데도 골리앗을 때려잡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신앙이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열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윗은 원수를 제압하면서 두려움 없이 항상 기쁨과 흥분 속에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제압하면 항상 기쁩니다. 사람들이 때로 낙심하고 절망하고 우울하고 염려하는 일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는 비법은 신앙생활의 연륜 관계없이 어릴지라도 우리가 항상 악한 영과 싸워서 승리 가운데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원하는 것이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지금 다윗이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만나서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고 한결같았기에 사는 게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 된 이유는 굴곡이 있었겠지만 어릴 때 신앙으로 갔었기에 어둠에 틈을 주지 않았고 나중에는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사울 안에 있는 악신이 떠나갑니다. 다윗의 찬양으로 말미암아 어둠이 떠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목동은 좋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은 자기 시간이 많다는 것인데요, 양 떼를 돌보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데 이때 다윗이 한 것은 기도입니다. 그 당시에 종교인들이 많았는데 종교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분명히 레위 지파를 통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임하지 않았단 사실입니다, 다윗이 목동으로 양을 칠 때 하나님이 거기에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하시는데, 내 직장과 내 가정에 임하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만 임하신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맨날 기도원에서 삽니다. 집 안의 일은 안 하고 기도원에만 가 있고 남편을 인도하려 하지만 남편은 말도 안 듣고 오히려 대적자가 됩니다. 천국 갈까요? 의문입니다. 우리는 내 삶이 무너지면 신앙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공식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진실된 예배입니다. 진실된 예배는 진실된 삶을 주고, 진실된 삶은 진실된 사역을 줍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으로 예배=아벨의 제사, 삶=에녹, 사역=노아 이 세 가지가 구원 공식입니다. 어떻게 구원받는냐? 내가 진짜 진실되게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바뀝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진짜 사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사역부터 하려고 합니다. 사역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자꾸 뭘 하려고 하는데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그다음이 삶의 아름다운 변화, 세 번째가 사역입니다. 먼저는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 천국 갈 정도 변모가 되어야 하고 그다음에 사역이 들어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3절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적으로 번역을 잘 했는데, 본래 의미는 주님의 손가락으로 하늘을 만들고 달과 별들을 형성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흥분을 주는 겁입니다. 매일 보던 해, 달, 별인데 지금 흥분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여행을 하면 똑같은 경치인데도 더 좋고 멋있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4절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약간 오번역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에 대해 몰두하시며’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일반 사람이 아니고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은 나를 계속 연구하실까? 나를 계속 생각하실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계속 생각하십니다. 다윗이 이것을 알고 흥분합니다.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원래 인자는 예수님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인데, 여기에서 ‘인자’는 큰 사람이 아니고 작은 사람을 말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아기 같은 우리,
'아주 연약한 우리를 무엇인데 계속 관여하시나이까’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서 가까워지면 늘 나만 생각하시다가 내가 낳은 영적인 자녀가 있는데 자주 방문하시고 아기처럼 돌보십니다. 돌봄은 부양하는 것이 아닌, 자꾸 방문하는 것으로 어르신들을 자주 찾아 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린 자들을 자꾸 찾아가시는 것에 대해 다윗이 흥분한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오번역으로 원어는 하나님이 아니고 ‘천사’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입니다. 원래 사람은 영적으로 천사보다 위에 있는데, 천사는 하나님과 거듭난 자녀를 섬기는 종입니다. 천사가 우리를 도와주면 기도가 잘 되고, 시험 걸릴 찰나에 빠져나올 수 있고, 내 사역의 길이 열리고, 말씀이 더 정확히 해석되고, 찬양할 때 찬양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천사는 영적인 일을 실제로 도와주는 나의 종입니다. 거듭난 자녀 옆에는 두 천사가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법궤 상판 두껑이 번제단과 연결돼 있는데 27m 높이의 두 천사가 구조물로 되어 있습니다 거듭난 자녀에게는 항상 천사들이 따라다니며 돕습니다. 애기 천사를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건 없고 미혹입니다. 천사는 날개가 6개이고 사람 같고 건장한 청년과 가장 흡사합니다. 천사의 몸은 번개 같은 형상으로 성경 그대로 입니다. 사람이 천사를 부리는데 ‘천사 명령권’ 이런 것이 아닌데, ‘내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찾아줘’ 이런 것들은 미혹이며 성경에 그런 사례가 없습니다. ‘부린다’는 것은 내가 임의로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내 영이 알아서 천사가 알아서 수종 드는 것입니다. 천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에 나를 돕는 자로 섬기는 것이지 우리가 명령하는 건 아닙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영계에서는 더 높은데 육을 입었기 때문에 천사보다 조금 못하다는 표현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육을 벗어버리고 영만 있다면 사람이 천사보다 더 높습니다. 육을 입고 있으면 영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천사보다 못한 것입니다. 내 영이 육체를 장막으로 삼고 있는데, 이 장막 안에는 내 영뿐 아니라 성령님과 귀신도 있습니다. 내가 육체를 벗어버리면 죽는 순간에 내 영은 천사보다 높은 상태에 있고 천사가 나를 끌고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천사는 나의 종인데 육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환희를 느끼는 면에서 천사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도다’
영광과 ‘영예로움’입니다. 내 영광이 천사보다 못하지만, 영광과 영예로움의 왕관을 씌우셨다고 다윗이 고백합니다. 쉽게 말하면 다윗이 ‘나 구원받고 보니까 너무 좋아요. 하나님이 나를 천사처럼 만들어 주셨네요!’ 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영광이 영적인 환희가 천사 같다는 고백입니다.

6절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누가 다스립니까? 젖먹이는 아이와 어린아이 같은 우리, 구원받은 자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만물을 다스리는데 만물이 뭘까요? 우리가 별을 다스립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내게 관계된 영역들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까 나로 말미암아 내 자녀가 다스려지고, 내 아내가 다스려지고, 동물이 다스려지고, 부모가 다스려지고, 즉 내 맘대로 잘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주변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만들어 주셨는데, 거듭난 자가 주변과 상황을 다스리며 주권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예수님이 만물을 발아래 두셨다고 성경이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일까요? 예수님이 아니고 구원받은 우리를 말합니다. 만물이 아닌 모든 것이 우리 발아래 두었다는 것인데, 우리가 모든 상황과 모든 것들의 지배자로 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셨고 드디어 자녀에게 만물을 지배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 권한은 모든 상황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원래 원어는 양이 앞에 나와 있는데, ‘모든 양과 소와 야생 동물이며’입니다.

8절입니다.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바다에 있는 물고기들도 길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발견됐습니다. 바다에 동물들이 가는 길이 있고, 또 선박들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하늘도 비행기가 가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따라가야지 맘대로 못갑니다. 비행하다 제트기를 만나면 비행기가 항로에서 딴 데로 휩쓸려갑니다. 비행기도 하늘의 길을 따라가야 되고 바다의 배들도 바다의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바다의 조류가 있어서 잘못 가다보면 못 가고 힘만 듭니다. 바다 밑에 있는 물고기들도 바닷길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 끝에 이것을 왜 썼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다스림의 이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상황과 사람을 다스리는 법칙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법을 따라 다스리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소와 양과 들짐승과 물고기 등을 다스리라는 말이 아니라 물고기도 길이 있는 것처럼 내 주변과 상황을 다스릴 때 이치에 따라 다스리라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맨 앞 절을 다시 쓰면서 대단원을 꾸밉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나를 이렇게 만들어 너무 좋아요. 너무 놀랍네요’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행복 자체입니다. 구원받으면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를 지나서 조금 반항하면 행복을 잃어버리며 살맛이 나지 않게 됩니다, 구원에 대한 ‘yellow card’입니다. 나중에는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잘하는데 죽을 맛이고 우울증에 구원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과 구원은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항상 기쁘고 복이 되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많은 목사들이 자살했습니다. 강해 설교를 수없이 했던 사람들인데 미혹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모르면서 성경을 가르치며 미혹만 잔뜩 뿌려놓고 자살한 것입니다. 지금도 나이든 목사님들 중 우울증 엄청 많습니다.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좋으면 시편 8편처럼 up된 상태로 살고 항상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면서 내 마음이 안 좋으면 ‘yellow card’입니다. 극단적인 생각은 구원 상실인데, 하나님과 관계가 안 좋으면 살 맛이 안 나고 괴로우며 죽고 싶고 때려치우고 싶어지는데 마귀입니다.

시편 8장의 key는 2절에 있는데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 힘이 있습니다. ‘내가 입술로 마귀야 물러가라! 떠나라!’하고 선포하면서 마귀를 물리친다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면서 주 이름을 찬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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