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시편 강해 1장 [천국 가는 사람]




시편 1장

[천국 가는 사람]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 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6절까지)


시편은 기도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던 기도와 하나님의 기도가 무엇이 다른가? 그 다른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기도를 간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기도 속에는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1편을 보겠지만 ‘기도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새로운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시편을 보실 때에 꼭 염두해 두실 것은 시편은 기도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잘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목적이며, 시편 내용을 아는 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이 끝날 때는 기도의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3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방언형 기도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주기도문형 기도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시편 형이 있는데, 이 시편형 기도는 자유형 기도입니다. 자유형은 자기가 마음껏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편형 기도가 가장 어려울 수 있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형 기도는 가장 깊은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마칠 때 우리의 기도가 바뀌게 되고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1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은 진짜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지금 기도 드리는데 기도가 훈계조입니다. 기도는 성령의 감동이 먼저 전제됩니다. 기도라는, 세계의 모든 전제는 ‘감동’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이것을 쓰는 이 순간에 분명히 감동이 왔을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생각지 않은 다른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참 많이 있지요! 내가 하려는 기도는 이것인데 내 입에서는 다른 얘기가 나옵니다! 입에서 ‘복 있는 사람은’ 시편 기자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나는 지금 다른 문제로 나왔는데, 내 입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세계는 다 감동만으로 하는 것입니다. 감동으로 설교도 하고 감동으로 기도하고 감동으로 찬양을 드립니다.

드디어 ‘복’이 나옵니다. 복이 무엇일까요? 복은 3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세상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되고 성취하는 것 그리고 건강하고, 인복이 있으며, 물질적인 복, 또 공명 성대를 이루어서 유명해지는 것 등의 복이 있습니다. 복입니까? 복은 아닙니다. 두 번째로는 기독교적인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었다’는 응답이 있습니다. ‘내가 그때 어려웠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해결되었어!’ ‘그때 내가 아팠는데 교회에서 기도 받고 병이 나았어!’ 등의 응답적인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것들이 복일까요? 지금 우리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적인 복을 복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여기에 충격이 옵니다! 만약에 직전에 말씀드린 것들이 복이라 한다면, 반대로 ‘욥은 의로웠는데 부서지고 고통당한 것은 그럼 무엇이냐?’ 이 기독교적인 복, 이것은 우리가 ‘미화된 복’입니다. 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이 복을 추구합니다. ‘하나님! 응답해 주세요!’ 우리는 기도의 시작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살아계시지요! 저에게 이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그러나 이 응답이 복은 아닙니다.’

시편을 쓰는 기도자가 처음에 어떤 강한 고통 때문에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아! 복이 이것이구나!’ 하고 복을 깨닫게 됩니다. 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 이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복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순간에 이 시편 기자는 ‘영의 눈’이 떠졌을 것입니다. 영의 눈이 안 열리는 것은 정확한 말씀의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우리는 영의 눈이 열리고 그때, 정확하게 신앙에 들어갑니다!

세 번째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복’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복이 복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진짜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천국은 보장되어 있고, 이 땅에 살면서 ‘응답 받으면 돼!’ ‘이 땅에 살면서 장수하면 되고!’ ‘건강하면 돼!’ 하지만 진짜 복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진짜 복이 무엇이냐? 진짜 복은 천국에 들어가는 복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30편에 나오듯이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니라’ 아마 기도 중에 이 진리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복은 영생이 복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은 100년이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는 순간에 지옥의 하루가 인생의 모든 고통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반대로 천국의 하루가 세상의 천날의 행복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으며’ 여기에서 ‘악인’은, 우리 안에 귀신도 되며, 미혹되어서 배웠던 잘못된 사상들이나, 주변에 있는 나쁜 친구들도 되는데, ‘꾀’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각의 죄’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요소입니다! ‘악인의 꾀’는 복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 가운데 죄가 있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생각 가운데 죄를 안 짓고 사나요? 다른 타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 타 종교도 겉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은 안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각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생각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의 변화를 받아 생각이 바뀌게 되는데 악한 꾀가 없어집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 ‘그에게 속임이 없다!’ 예수님 만난 적이 없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느니라! 네 맘속에는 속임이 없도다!’ 하고 나다나엘을 칭찬했습니다.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깨끗한 것입니다. 이 깨끗한 생각,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며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쉽게 말하면 ‘십계명’이라는 눈에 보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외적으로 범죄한 것입니다. 물론 100% 지옥 입니다. 범죄하는 것, 복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범죄는 나쁜 생각이 모아져서 드러난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면 그 배후에는 많은 꾀가 있는 것입니다. 꾀가 누적되어서 어떤 현상적 죄를 지은 것이지, 인간은 한 번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일, 곧 의를 행할 때도 그 의가 나타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하였다면, 무조건 지옥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이것은 죄가 습관이 되면 죄를 지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그런 단계가 옵니다. 처음에는 죄가 떨립니다. 죄를 한 번 지으면 죄의식이 생깁니다. 수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수치심이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죄가 그냥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자신을 받아 줍니다. ‘인간은 죄인이야! 아무도 의로울 수 없어!’하고, 자기를 받아 줍니다. 그것이 ‘오만한 자’입니다. 이미 확고해진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귀신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못 들어옵니다. 주변을 살짝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나의 죄가 좀 깊이 지어지면 귀신이 살짝 머물다가 지나갑니다. 또 내가 죄를 더 깊게 지으면 귀신이 내 안에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만하다는 것은 이미 귀신이 터를 다 잡은 상태입니다! 죄를 지어도 다 합리화합니다. 자기를 변호하고 변명합니다. 오만한 자는 구원이 어렵습니다. 구원은 아주 어릴 때는 그냥 받아들이는데 사춘기 때는 자리 잡으면 말을 안 듣습니다. 구원은 통계가 있는데 20살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역시 구원에 들어가고 나이 먹으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3가지가 ‘복’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일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이것을 못하는데 예정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붙잡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데 죄를 짓지 않게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간섭을 받습니다. 간섭을 받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간섭이 구원은 아닙니다, 그러나 간섭현상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자꾸 돌아서고 자꾸 뉘우치고 돌아서는 회개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생각마저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2절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율법이 나옵니다. 율법은 원어로 그냥 ‘법’입니다. 모세 오경으로 더 축약하면 ‘레위기’ ‘민수기’이며, 신명기는 ‘요약 편’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이 딱딱하다고 합니다. 신약 때는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다 거쳐야 합니다. 우리 신앙은 율법을 거쳐 가야 합니다. 몽학 선생이 필요합니다. 몽학 선생은 유치원 교사 또는 초등교사이기에, ‘율법’이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거듭난 사람, 홍해를 통과한 사람은 율법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 십계명을 모르는데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과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과정이 있고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는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 오세요! 사랑합니다!’ 이런 것 하지 마세요! 밤이건 낮이건 십계명을 암송하고 내가 범죄한 것이 없나, 내 생각의 죄가 없나, 내게 거짓된 것이 없었는지, 자기를 늘 점검해야 하는데 이런 것은 하지 않고 자꾸 우리 하나님을 감각으로 만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율법에는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우리가 준행하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다 버리고 감각으로 사는 것은 이단 사이비입니다. 이것은 ‘이방 종교’입니다. 이방 종교는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초현실적인 내용들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증명하는 방법은 이 성경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으로도 체험으로도 안됩니다. 이 성경 말씀에 순종만이 하나님을 증명해 냅니다!

3절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자! 열매가 나옵니다. 열매는 ‘돈이 생겼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내가 전도 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하나님이 보실 때 ‘열매’입니다. 나무에 열매가 있는데 우리가 먹습니다. 왜 먹습니까? 내가 맘에 들어서 먹는 것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이 따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사람을 누가 먹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너 정말로 내 말대로 하는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해! 열매를 먹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결단했어요. 오! 하나님이 기뻐해서 열매를 먹습니다.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통해 기뻐해서 하나님이 먹는 것입니다. 물 옆에 심은 나무는 물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습니다. 물이 무엇입니까? 물은 바로 말씀, 율법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물을 많이 먹고 법을 많이 지키면 열매를 맺는데 그 사람에게 ‘의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의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 하고, 아들에 대해서 기뻐하므로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요셉이 형통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감옥에 갔는데 성경에 ‘형통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요셉은 죄를 짓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 대해서 ‘영적인 형통’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영적으로 형통했습니다. 형통의 결과가 죄를 짓지 않은 것입니다. 요셉은 유혹도 물리치고 왔는데 결국에 얻는 것이 감옥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형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불평했을텐데, 요셉은 불평하지 않았고 그것이 ‘형통’이란 것입니다! 형통은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신앙생활 잘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신앙생활 잘할 수 있습니다. 항상 신앙생활 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목사가 되면 좋겠다!’ ‘장로가 되면!’ ‘남들을 인도하는 사람이 되면!’ NO!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인도를 받든지, 인도 하든지, 남들이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항상 가능합니다! 어떤 상태이든지 죄를 피하는 능력, 그것이 형통함입니다!

천국의 3요소가 있는데 교회와 직장과 가정에서의 성공입니다. 어디 있든지 성공해야 하고, 어디 있든지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헌금 많이 하고 진짜 뜨거운데, 직장에서 개판이고 가정에서는 자기 아내를 구타하는데 지옥입니다. 어떤 상태이든 죄를 피해 가는 능력 그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형통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구약을 보면 어떤 인물들도 죄지은 사람이 없습니다. 특별한 예외가 있지만 회개했고 없습니다.

4절입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하며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겨는 심지가 굳지 않은 것입니다. 키질을 하면 겨가 바람에 날려갑니다. 이것은 시대 풍조에 따라 다 휩쓸리는 것입니다. 겨들은 내 마음대로 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교회가고, 하고 싶은 만큼 헌금도 하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잡히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자 되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매인 받는 것이 악인들과 다릅니다.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없는데, 바로 하나님이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에 결단할 때 오는데, 결단하면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고 가까이 하십니다. 악인들은 마음대로 삽니다. 겨들은 늘 바뀌고 늘 갈등이 있습니다. 선인이 되면 갈등이 없습니다. 그냥 편합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심판이 3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불 못’의 심판입니다. ‘음부가 불 못에 던지우더라!’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드디어 모든 음부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죄인들이 던져지는 곳이 ‘불 못’입니다. 백보좌 심판을 통해서 죄의 대가를 영원히 받는 심판입니다. 사람들은 그럽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짓지 않았는데 거기 들어갈까요? 거기 들어가 보시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그때 가서 압니다. 지금은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압니다. 심판대 앞에서야 내가 발가벗겨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죽음’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죽자마자 현재의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때는 약간 압니다. ‘내가 이렇게 죄를 많이 짓고 살았구나!’ 아직은 심판을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심판을 통해 음부에 떨어질 때, 그때 압니다. ‘내가 교만했구나! 용서하지 못했구나! 미워했구나! 음란했구나!’ 그때 가서 압니다.

세 번째 심판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항상 ‘비복음 지역’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지역은 항상 열악합니다. ‘사막화’ 현상이 많아지고, 농사가 잘 안되고, 먹지 못하는 기아가 생겨나고, 1달러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이 지구에 1억 명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 1년에 천만 명이 굶어 죽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데 심판입니다. 지금도 지구는 심판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동의 이슬람 지역의 사람들 삶은 형편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지역에는 심판을 가하십니다. 그것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이 땅에서도 너무 악이 차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죄인들이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자! 악인은 뭐고 죄인은 무엇일까요? 원래 ‘악’이란 말은 마귀에게 쓰는 말입니다. 죄인은 마귀에 의해 속임 당한 사람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 용어가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 입니다. 왜? 안에 ‘악한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죄인인데, 악한 마귀 영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며, 성령의 은혜가 나를 전적으로 주장 할 때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만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이고 마귀는 악이고 인간은 다 죄인인데 죄인이 하나님 만나서 내 속에 악이 멈춰버리고 의로 바뀌어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영적인 모습으로는 악인이고 인간의 모습으로 죄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죄인이면서 악인입니다. 영을 봤는데 악한 영 마귀를 따르면 악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모습으로는 죄인인데 여전히 인간이기에 아직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영적인 모습으로써의 심판에 대한 악인이고, 죄인은 아직 심판받기 전에 상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무엇입니까? ‘참교회’입니다.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는 영적인 무형교회에 들어올 수 없으며, 참교회도 들어오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다 미혹된 교회를 추앙하고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6절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자! ‘의인의 길’은 ‘의인의 인생길’ 입니다. 우리 인생에 길이 있는데 어떤 한순간에 잘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길 자체가 계속 의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자서전 또는 전기문이 ‘의인이 가는 길’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천국 가는 길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망합니다. 어떤 사람이 망하면 잘못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 망하는 것이 ‘질병사를 통한 죽음’이든지, ‘경제적인 어떤 파산’이든지, ‘인간 관계적인 고립’이든지 뭐가 된다고 할지라도, 모든 망함의 배후는 다 잘못된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망함을 볼 때 우리는 근본적인 회개를 시작해야 됩니다. ‘내가 잘못 살아왔구나, 그게 아니었고 이게 맞는 거였구나’하며 정확하게 눈이 띠어지면서 새로워집니다. 근본적인 변화, 이게 바로 ‘회심’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계속 작정해서 간구해야 됩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서 죄로부터 자유가 옵니다. 모든 부자유는 죄에서 오는 것인데, 인간은 죄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복 있는 사람으로서 천국에 들어갑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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