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욥기 강해 42장 [고난은 복음전파의 능력을 갖게 합니다]

 


욥기 42장 

[고난은 복음전파의 능력을 갖게 합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1절~17절까지)

1절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드디어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2절입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계획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여도 철회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3절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나님 앞에 담대했던 욥이 갑자기 꼬리를 내립니다. 욥은 지식이 없는 꾀를 갖고 있고, 이해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고, 놀라운 것들을 말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욥이 한 말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올 때, 어떤 항변을 하겠지만 사실 인간은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오번역입니다. ‘(Hear)들으세요’입니다. 당신께 청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이 드디어 결론적인 말을 합니다.

5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욥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았던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난을 당한 다음에 보니까 이제는 하나님 보인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오번역으로 ‘abhor(혐오하다)’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부인을 말하는데, 자기 부인은 내 자아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도 부정되고, 내 말도 부정되고, 나한테 온전한 게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내가 남을 혐오했는데 자신이 혐오되는 것입니다. 나한테 선한 게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7장은 굉장히 높은 성결을 말합니다. 난 도저히 선이 없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욥은 악한 사람이 아닌 굉장히 선한 상태에 있는데, 하나님이 가까워진 증거로써 자기가 깨닫고 분리된 자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지만, 우리의 모든 생각들이 하나님과 늘 대적 가운데 있고 늘 빗나갑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자기 자신이 부정된 것을 회개하는데, 회개의 이유는 다윗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항상 죄인인 모습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잘나면 고난을 불평하지만, 내가 못나면 당연하게 이해됩니다. 사람은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그런데 내가 형편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감사합니다.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의 말도 고맙고, 재난을 만나도 고맙고, 푸대접도 고맙고, 무엇을 만나도 고마운 것입니다. 불평하는 것은 마음에 교만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악을 깨닫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과 엘리바스 두 친구의 말이 옳지 못한 것입니다. 옳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고난을 끌어온 것입니다. 하나님만 옳은 것입니다.

8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이것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지금 세 명의 친구들이 욥과 대화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고 드디어 구원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 때문에 수혜자가 세 친구들입니다. 욥은 고난을 받았지만 결국 세 명의 영혼을 얻은 것입니다.

일곱 수소와 일곱 숫양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욥이 번제를 드릴까요? 욥은 영적으로 제사장인데 선지자로 승격되는 것입니다.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세 친구들을 보실 때 어리석었는데 욥 때문에 그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문법적으로는 욥의 말이 틀린 말은 맞습니다.

9절입니다.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의 제사를 받으셨고 결국에는 세 친구들이 구원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유사 기독교인이 참 기독교인으로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욥은 참 기독교인이지만 징계를 주신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근본적으로 욥에게 고난이 왜 왔을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존재하느냐?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사는데, 그것은 내 목적이지 하나님 목적은 영혼 구령에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중보한 자체가 그들을 주님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게 바로 회복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복음 전파로 온전한 전향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당하지만, 전파를 통한 고난이 훨씬 가치 있는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세 명을 구원하시기 원하셨는데, 욥이 롯처럼 혼자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영혼을 구원하라고 건드신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30년 만에 형제와 자매와 친척들이 다 와서 위로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닌데 무엇일까요? 관계의 회복입니다. 욥이 부자였을 때는 친척들이 바빠서 못 왔겠지만 망하고 나니까 불쌍히 여겨 오는데,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낮아지면 같이 소통되는데, 높아지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케쉬타는 한 조각의 돈으로 양 한 마리 가격입니다. 1명이 250만 원 정도의 돈을 구제해주는 것입니다. 10명이면 2,500만 원이고, 100명이면 2억 5천만원입니다. 형제들과 이웃들의 도움이 온 것입니다.

욥이 고난 받기 전에는 부자이기에 절대 이 돈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일 정도로 낮아진 것입니다. 구제해주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날 뭐로 보냐'는 것입니다. 구제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자존심이 세서 자기 이름이 높아지길 원하는데, 구제 대상이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그것을 겸손하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중보할 정도로 여유있게 되고, 이웃들의 구제를 받을 줄 알게 되었습니다. 케쉬타가 사실 큰 돈입니다. 형제들이 큰 금액을 구제해주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없을 때 구제를 즐거이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킬 때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늘에서 금덩어리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은 구제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이 구제했을 때 살아난 것입니다. 없을 때는 구제가 우리에게 일어날 방법입니다. 우리가 남한테 돈 달라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그런데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형제들과 이웃들이 욥을 얼마나 불쌍히 여겼으면 돈을 다 구제하고 귀금속까지 주었습니다. 완전한 구제를 받은 것입니다. 남한테 구제받고 긍휼을 받은 것이, 축복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제 받을 때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구제는 다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자를 미리 정했다고 했습니다.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데, 받을 때 자존심 상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항상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자에 의해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유한 자를 보내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부유한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굶거나 어려워지지 않고 항상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모세는 광야에서도 같이 먹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하수들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간직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주 업무들입니다.

야고보서에 ‘너희 부유한 자들아! 화 있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종을 고소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동생 야고보도 고소하는 게 나오는데, 내가 지옥 간다고 나옵니다. 부유한 자들은 그 돈을 내면서 자기가 무엇을 하는 줄 아는데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구제의 대상이 똑같은 것입니다. 받는 것도 은혜고, 주는 것도 은혜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설교하면 더 나은 것도 아닙니다. 목사가 높은 것이 아니고,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예수님 외에 높은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만 우리가 섬기는 왕이시고 각자 받은 은사로 섬기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겨리는 두 마리가 한 겨리인데, 소가 2천 마리입니다. 처음에는 욥은 양이 7천 마리였고, 낙타가 3천 마리였고, 소가 500 겨리습니다. 지금은 2배입니다. 고난받기 전보다 고난받고 난 이후에 2배가 됩니다. 욥이 70세에 고난 당하고 100세에 끝나서 140년을 더 삽니다. 70년 동안에 누린 복에 내용이었고, 140년 동안 2배로 갚는데 수명도 2배, 물질도 2배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을 강화시킵니다.

13절입니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이것은 똑같습니다.

14절입니다.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여미마는 ‘비둘기’이고, 긋시아는 ‘계피’이며, 게렌합복은 ‘눈화장’입니다. 1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재난 당하여 지옥 갔습니다. 그들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욥이 고난 당하니까 세 친구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먼저 받은 사랑의 대상이 되고, 또 자기 자녀들이 천국 가는 길로 인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큰 목적입니다. 자기 딸들이 영적으로 휼륭하게 되었습니다.

15절입니다.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기업은 유산입니다. 옛날에는 법적으로 딸한테 유산이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이 딸에게 유산을 주는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 유산은 구원인데, 딸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고난이 믿는 자에게 왜 필요할까요? 나를 거룩하게 해서 천국으로 인도하며, 내가 더욱 거룩해져서 다른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게 고난의 목적입니다. 능력이 거룩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능력은 거룩에서 나옵니다. 거룩 속에서 복음 전파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참 복음은 거록 속에서 능력이 있기에 목회자는 당연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거룩이 목표, 이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 곧 깨끗함이 능력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거룩이 제일 중요합니다. 거룩의 등급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고, 전도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거룩의 빛만큼 능력이 나가는 것입니다. 욥이 드디어 더 거룩해져서 구원이라는 참 빛을 쏘는데, 빛의 전파로 다른 영혼이 돌아옵니다.

16절입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4대까지 아들을 보았는데 영적으로 구원을 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많은 후대를 양성합니다. 고난받으면 후대가 많아지고 순교하면 그 지역, 나라는 복음이 전파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순교자를 세우십니다. 순교의 피 앞에, 즉 고난 앞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육의 후손들이 번성합니다. 고난은 영적인 축복과 육을 가중시켜 주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욥은 240세를 살아갑니다. 욥은 나홀 저 밑에 자손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란으로 보고 있는데 아브라함과 아브라함 이후, 야곱 이후 확률이 큽니다. 이때는 이집트에 왔을 때로 이해됩니다. 드디어 이 세상에 있는 참 자녀 야곱 후대들이 구원을 잃어버릴 때, 그때 누구를 세웠느냐? 그때 세운 사람이 저는 욥으로 이해됩니다. 욥은 나홀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인데, 그가 의로웠고 구원에 들어왔고 3, 4대가 구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구원이 상실되는 시기에 그때 빛을 발한 것입니다. 구원의 빛이 꺼져가도 어딘가에는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이 막히니까 이방인에게 일어난 것처럼, 다시 이방인이 막히니까 이스라엘에 구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항상 역사하십니다. 누구한테 역사할지 모르는데 항상 계대를 이어가십니다.

욥기는 사실 창세기 전이 아니라 이후이며 모세오경 이후 그때 사이로 보는데, 저의 견해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로 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의 모든 대화가 출애굽기 이후로는 전혀 매칭되지 않습니다. 내용들이 창세기와는 매칭되는데, 창세기 이후이면서 출애굽기 이전이라고 봅니다. 모세의 쓴 글과는 전혀 매칭되는 것이 없습니다.

순서상으로는 창세기 다음 욥기가 와야 합니다. 그래서 나홀 후손이 드디어 복음이 전파되는데 하란 쪽일 확률이 큽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데 때로는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영광이 옵니다. 영적인 영광만이 아니라 육의 영광이 오니까 고난을 참고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고난을 감사하면 됩니다. 고난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고난이 올 때, 감사하고 받아들이면 우리에게 더 큰 영광이 주어집니다. 고난이 올 때마다 영이 더 커지고 강해집니다. 반대로 복이 올 때마다 영이 망가집니다. 그래서 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복을 다 구하지만, 장성하면 복을 구하지 않습니다. 복이 우리의 영을 다 망가뜨립니다. 우리는 고난 앞에 당당하고 무서워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고난은 거룩하게 만들고 신실되게 만들며 진정한 복음 전파자로 만드니까 고난은 유익합니다. 때로는 고난의 풍파가 지나간 다음에 고난이 우리 삶 가운데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때를 정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내가 맞아들여야 할 때는 잘 맞아들여야 합니다. 다시는 고난이 안 오며, 맞아들이고 싶어도 오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고난에 대해서 간구를 많이 했습니다. 고난을 달라고 했는데 지금은 오지 않습니다. 저는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저는 고난으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습니다. 고난 때문에 영적인 많은 증진이 있었습니다. 고난이 올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불행이 하나님의 행복이라면 난 불행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순교합니까? 순교로써 하나님을 영광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불행마저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위해서 신앙 생활합니다.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면서 아팠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에 아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4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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