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욥기 강해 16장 [내 죄로 고난당하신 예수님]


욥기 16장

[내 죄로 고난당하신 예수님]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2절까지)

1절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엘리바스가 욥을 정죄한 15장의 내용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2절입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이런 말은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합니다.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오번역이며 ‘재난’이 아니라 ‘miserable(비참한, 천하다)’가 정확환 표현입니다. 즉, 지금 세 친구가 하는 말들이 욥에게는 천박한 위로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즉, 헛된 말들을 끝없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오번역이며 ‘무엇이 너를 대담하게 만들어서 이같이 대답하게 하는가’입니다.

4절입니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오번역입니다. 너의 영혼이 나한테 들어온다면 즉, 만약 서로 입장이 바뀐다면 나도 너희들에게 대적하는 말들로 싸울 수 있고 머리를 흔들고 비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오번역이며 ‘그러나 나라면 내 말로 너희에게 힘을 북돋아주었을 텐데’입니다.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즉 ‘내 입술의 움직임이 너희의 큰 슬픔을 누그러뜨렸으리라’입니다.

6절입니다.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큰 슬픔이 누그러들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다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그분이 나를 피곤하게 하시며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집안은 오번역이며 ‘무리(company)가’ 적절한 표현입니다. 내 모든 무리를 황폐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오번역이며 당신이 나를 주름으로 채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오번역이며 ‘그 주름이 내게 대한 증거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주름이 하나님이 나를 대적한다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지금 내 안에서 올라오는 쇠약함이 내 앞에까지 증거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즉, 쇠약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9절입니다.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내 적들이 나에 대해서 눈을 날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욥은 자녀가 죽고, 기왓장이 무너지고, 아내가 자신을 저주하며 죽으라고 했고, 친구들의 비난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10절입니다.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이상합니다. 욥이 언제 뺨을 맞았나요? 욥은 한 번도 예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욥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시편에서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는데, 고난 가운데 있어 보니까 본인도 모르게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욥은 경험한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된 것처럼 어떤 환각 속에 빠져든 것입니다. 어떤 무리들이 내 뺨을 치고 모여서 대적하고 입을 벌려 삼키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악인이 아니라 불신자가 정확한 표현이며, 불신자에게 넘기시고 행악자의 손에 나를 던졌다는 것입니다.

욥에게 있었던 일이 아닌 예수님에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고개를 흔든다든가 뺨을 친다든가 무리가 모여서 죽이려고 이를 갈고 핍박하며 소리 지르는 장면 등이 그러합니다. 지금 욥에게 예수님의 감정 이입이 되고 있는데 이유는 욥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때도 믿는 자에게 예수님이 계셨을까요? 성경에 “아브라함이 나를 보았거늘”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에게 다니엘 세 친구가 절하지 않으니까 풀무 불에서 세 친구 옆에 누구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군대 장군이 앞에 나타났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예수님의 초림이 오지 않았기에 십자가 경험을 못한 상태인데, 욥은 미리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구나. 나는 의로운 사람인데 이것만으로 안 되는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되지 않으며 반드시 속죄, 즉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게 여겨짐이 있어야 합니다.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자처럼 여겨지는 이신칭의가 나타나야 되며 십자가의 공로가 필요한데 구약 때도 계시를 통해 이것을 알게 됩니다.

12절입니다.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오번역이며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산산조각 내며’입니다.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이런 일이 있었나요? 신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구약 시편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일을 언제 당하셨을까요?

제가 예전에 성지순례를 갔었습니다. 빌라도 법정 근처에 고문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판결을 받고 채찍을 맞는데 그사이 2시간이 성경에 비어있습니다. 오전 6시부터 8시가 비었는데, 8시부터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갔을 것이고 9시에 못 박히셨습니다. 고문실에는 그때 유물들이 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지하고문실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기에 사람들은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시편이나 욥기에서는 예수님의 고문 현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구약의 내용을 잘 모릅니다. 길게는 4시간, 짧게는 2시간 동안 예수님이 당한 엄청난 고문의 현장을 표현한 것입니다

13절입니다.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오번역입니다. 그의 활 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것은 구타를 말하는데, 고문 무기로 때리는 장면입니다.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오번역이며 ‘내 콩팥들을 산산조각 내고’ 즉 ‘내 옆구리를 가격하고’입니다. 권투 할 때 옆구리를 치면 맞은 사람은 쓰러집니다. 잽을 날리며 휘청거릴 그때 밑에서 치면 엄청 고통스러운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옆구리를 맞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십자가를 못 지십니다. 그 전에 채찍에 49대를 맞으셨고 고문을 당하셔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중에는 십자가를 지시다가 쓰러지고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이게 무엇이라 생각됩니까? 쓸개는 간 안에 있는 담낭인데 쓸개가 나올 수 있습니다. 배를 치면 위에서 구토가 되면서 십이지장에 있는 담즙이 역류해서 올라옵니다. 구토는 위, 십이지장, 식도에서 올라오는데 그 통증이 너무 심하면 십이지장에 담즙이 역류해서 구토색이 녹색이 나옵니다. 얼마나 심하게 맞았으면 옆구리 통증만이 아니라, 토할 때 녹색 내용물까지 나온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쳐서 몸이 쓰러지는데 아마 손을 묶고 쳤을 것입니다. 칠 때마다 몸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고문당하는데 얼마나 세게 쳤으면 상대방이 거인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오번역이며 ‘sack cloth(포대 자루)’입니다. 내 피부에 포대 자루를 꿰매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뭘까요? 피부색이 그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절입니다.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오번역이며 ‘foul’ 더럽다 보다는 냄새나는 끔찍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영화를 보면 십자가에서 예수님 얼굴이 굉장히 끔찍합니다. 완전히 피로 물든 것입니다.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눈꺼풀이 까맣게 된 것입니다.

17절입니다.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고문당하는 그 가운데서도 기도하신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맞아서 피가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문실에는 피 흔적이 있습니다. 피는 사라졌지만 흥건했던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성지순례를 가지 않았다면, 이 내용을 몰랐을 것입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정확히 모르고 신약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전수된 것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처참한 모습 앞에 이스라엘 딸들이 울었습니다.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맞을 때마다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는데 ‘아, 아~, 악’ 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맞을 때마다 그 고통에 소리가 다르게 나왔던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오번역입니다. ‘보라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 현재형입니다.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오번역이며 나의 ‘record(기록)’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기록이 어디 있나요?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닌, 수난의 현장들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친구가 아닌 친구들 복수입니다. 여기서 친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지 욥의 친구들이 아닙니다. 왜냐면, 20절까지 예수님이 증인 되기 때문입니다.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그러나 내 눈은 하나님에게 쏟아 붓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배반하고, 부인하고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맹세하여 저주했는데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저주한 내용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21절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오늘의 말씀에 key가 이 구절에 있습니다. 오번역이며 원어는 ‘오!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탄원할 수 있고 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고난받는 가운데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떤 탄원일까요? 죄를 없이 하는 무죄로의 탄원입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 있는데 환상이 열렸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환상 가운데 욥은 그분이 왜 이런 고통을 당했는지를 깨달았고 오직 속죄를 통해서만 무죄선고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구원에 도달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로는 계명을 준수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갈 수 있을지라도 그것만으로 구원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욥은 속죄를 통해서 구원을 깨닫고 지르는 탄성으로 ‘오!’를 말한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수년이 지나면’ 욥의 죽음이 거의 임박한 상태인데 수년은 죽음이 아닙니다. 인생은 며칠에 불과하고, 죽으면 연옥에 가고, 주님이 재림하시면 낙원 천국에 올라갑니다. 여기서 수년은 낙원 천국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연옥을 몇 개월이라 하면, 낙원 천국을 수년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수년이 지났으며 재림하실 그때 내용입니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면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새 예루살렘은 영계와 자연계가 혼합된 세계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속죄의 은혜가 뭐냐면, 우리에게 ‘새 예루살렘 성’이라는 재창조 이후에 삶의 은혜를 준다는 결론입니다.

욥에게 십자가의 공로는 영생 천국, 새 예루살렘의 복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는 큰 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만이 아니라, 그 직전에 엄청난 고문까지 받았습니다. 고문 내용이 신약에는 기록되지 않았고 구약에만 나오는데 이 고문이 너무 잔인합니다.

고문 장소에는 무기들이 있는데 쇠꼬챙이, 망치로 2시간 이상 동안 가격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다시 갈고리 채찍으로 맞게 됩니다. 채찍은 5cm의 생선뼈로 된 채찍이었습니다. 온몸이 찢겨진 것입니다. 당시 피가 쏟아지는데 예수님이 세마포에 젖은 피가 전체에 반이 넘었습니다. 이런 고통을 당하셨는데 그냥 죄인들을 구원하시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시는데 아무나 구원하겠습니까? 못합니다. 예수님께 충성한 사람들,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순교자들, 목 베인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없고, 등잔대 만으로도 안 됩니다. 내가 떡상이 되어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내 아들을 주는데 ‘그냥 믿으면 돼~!’ 이런 미친놈이 어디 있습니까? 그 아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자에게 생명의 값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거저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등잔대로 변화되어서 흰 꽃이 되어야 하고, 떡상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합니다. 내 목숨을 버릴 정도가 되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결론은 다 순교입니다. 이 정도의 신앙이 되어야만 속죄의 값이 지불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종착역은 재창조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이고 새 예루살렘인데, 성경은 요한계시록 1, 2장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삶은 하나님처럼 사는 영광의 삶인데, 그것을 그냥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한 영접 고백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목숨을 드릴 정도의 충성을 통해서 속죄의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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