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시편 강해 3장 [나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


시편 3장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8절까지)


시편 3장은 다윗이 쓴 시인데, 압살롬이라는 자기 아들의 반역으로 예루살렘 성을 빼앗깁니다. 다윗이 도망 다니면서 쓴 시입니다. 다윗은 천국 가는 신앙인을 의미하며, 동시에 천국 가는 신앙인이 어떻게 기도했는가? 기도한 내용들을 쓴 것입니다.

천국 가는 신앙인이 받는 3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마귀 공격이 3가지 입니다.

첫 번째는 물질적인 고통입니다. 물질의 시험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천국 가는 신앙인에 대해서 계속 괴롭히는 고통입니다. 지금 시점은 다윗은 이미 과거 어릴 적 목동 시절에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고, 골리앗을 때려잡은 사람이고, 사울 왕으로부터 쫓기면서 고통을 당해 신앙이 완숙되고 드디어 나중에는 밧세바를 취하여서 간음죄를 지은 다음에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그리고 세월이 지난 다음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신앙이 굉장히 완숙되었을 때입니다. 완숙한 신앙 이런 다윗에게 또 다른 문제가 온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인간적인 시험입니다. 천국 가는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적인 공격이 계속 들어옵니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자기 아들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아들이 나를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옛날에는 장인 사울이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이 공격을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고통이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환경적 고통입니다. 자연계를 통한 고통 재난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3가지 고통은 다 마귀의 공격에서 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냐? 모릅니다. 이것은 죄에 근거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질병이 있습니다. 질병은 죄에 근거합니다. 모든 질병들은 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할 때, 질병이 왔다! 그러면 무조건 회개하는 것입니다. 별거 없습니다. 우리가 아프다! 무조건 회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병들은 다 회개로 치유가 일어납니다. 산 증인이 있는데 접니다. 저는 병원에 간 적이 없습니다. 저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이빨이 아프건, 머리가 아프건, 배가 아프건, 어디가 쑤시건, 무조건 회개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모든 병들이 낫습니다. 하지만 외부 공격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외부 공격들은 죄에 근거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외부 공격들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신앙이 다 완숙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인생에 마지막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이 먹어서 자기 아들을 통한 공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장은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공격에 대해서 쓴 시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여’ 하나님의 이름, ‘야훼’, ‘야파’ 하나님의 이름이죠. 하나님을 지금 부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여기에서 대적이라고 하는데, 원어로는 ‘나를 공격하는 자들이 너무 많이 증가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공격하는 자들이 되게 늘고 있어요’입니다. 감소가 되어야 하는데 압살롬이 공격할 때, 실제로 다윗의 측근들이 자꾸 빠져나갑니다. 다윗은 선왕이었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왕인데, 압살롬이라는 자기 아들이 공격할 때, 자기 신하들이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이 시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이것도 오번역입니다. ‘나를 대적하려고 그들이 일어났습니다.’ 상황이 일어났다는 얘기입니다. 압살롬이라는 자기 아들과 자기를 따르는 신하들이 반역자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인데 사건 발발입니다. 이 사건을 다윗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토로합니다. 우리는 기도 할 때, 내 상황을 먼저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을 더 잘 아십니다. 그 상황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마귀가 일으켰습니다. 모든 마귀 공격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마귀 공격이 일어납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일어난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하신 것을 알면서도 자기의 사안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룁니다.

2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말이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남자들은 특히 말의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여자들의 말은 남자에게 비수를 꽂습니다. 이 ‘말하기를’이 언어적 공격에 다윗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지금 압살롬뿐만 아니라 신하들은 지옥에 들어가는 크리스천들입니다. 이들이 천국 들어가는 크리스천을 향해서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얻지 못한다’라고 근본적인 신앙에 대해서 흔드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신앙인이 지옥 가는 신앙인에게, ‘너 천국 못가’ 하는 것이 맞는 것인데, 지옥 가는 신앙인이 천국 가는 신앙인한테, ‘너 천국 못가. 하나님이 널 버렸어’라고 정반대로 마귀가 공격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은 영적인 세상인데, 천국 가는 신앙인과 천국 가지 못하는 신앙인에 갈등이 항상 존재합니다. 갈등의 포인트가 천국 가는 신앙이 공격하지 않고 대부분 지옥 가는 신앙인이 공격해 들어옵니다.

다윗은 천국 가는 신앙인인데 배반하는 신하들과 압살롬 이들이 말하기를 ‘너! 구원을 못 받아!’ 뭡니까? 다윗의 신앙 자체를 부정합니다. 이때, 엄청난 고통이 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공격들은 어디서 옵니까? 마귀에게서 오지만 마귀가 잡은 사람을 통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서 공격이 들어옵니다. 재난과 가난, 인난 셋 중에서 인간적인 고통에서 마귀에게 잡혀있는 사람에게서 말로써 공격이 들어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고통을 느낍니다. 다윗은 자기 신하들에게 절대 압살롬을 죽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성을 빼앗긴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신앙은 높은 차원이기 때문에 자기 성을 빼앗긴 것, 왕권을 잃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윗의 관심은 내가 믿는 신앙으로 사람들이 와야 하는데, 하나님의 신앙관이 도전받는 것에 대한 다윗의 처절함입니다.

‘(셀라)’ 이 셀라는 ‘아멘’이 아니고 ‘자 이제까지 네가 읽었느냐? 그러면 이제까지 읽은 것을 잘 묵상하라!’ 이것입니다. 음악적 용어입니다. 우리가 한 절을 읽은 다음에 다시 묵상합니다. 이게 무엇일까? 하고 다시 묵상하는 음악적, 시적 표현입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상황은 너무 큰데 다윗 안에서는, ‘하나님 그런 것 아무것도 아니예요!’하는 것입니다.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신다는 얘기입니다.

‘나의 영광이시요’ 이것은 ‘내가 올라간다’는 얘기입니다. 마귀의 공격을 왜 허락하십니까? 영광 때문입니다.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 장대에 결국은 누가 죽습니까? 하만이 죽습니다. 하만의 공격이 들어오는데 모르드개가 영광 받습니다. 무엇 때문에? 마귀 공격 때문에! 마귀의 공격이 들어올 때, 우리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은 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마귀의 공격들은 결국은 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우리가 잘못하면 고개를 숙입니다. 머리를 내립니다. 그런데 잘하면 고개를 쳐듭니다. 고개 드는 것은 나를 세워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나를 무엇 때문에 세워 주느냐? 이런 마귀의 공격에서 맞서 기도를 통해서 내가 세워집니다. 때로는 내가 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얻게 되어 있고 이기게 되는데, 이 기회는 승리의 기회가 되고 내가 올라가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격이 올 때 두려워하지 말고 나의 머리가 올라가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믿음으로 대하면 됩니다.

4절입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이것은 지금 다윗이 기도하는데 묵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입으로 외쳐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묵상기도, 통성기도, 부르짖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주 격앙된 상태에서 막 토해낼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다윗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그의 성산은 ‘거룩한 언덕’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산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높은 산이 헬몬산 외에는 없습니다. 갈멜산도 낮아서 다 언덕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응답 될 것을 마음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 순간 마음에 확신이 들어온다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캄캄한데 마음이 지금 뿌듯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확신입니다. 다윗이 간절히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온 것을 확신입니다. 확신은 하나님의 선에서 응답이 내 마음에 오는 것입니다. 1, 2절은 상황에 대한 다윗의 토로이며, 3, 4절은 다윗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들의 기도 스타일입니다. 이제부터가 다윗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도의 세계입니다. 4절까지의 기도 내용은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만약에 다윗의 기도가 4절까지라면 시편이 기록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 세계가 다윗처럼 깊어져야 하는데 다윗은 그다음이 있는데, 영적인 세계가 들어가져야 합니다.

5절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이것은 내가 누워서 자고 깨었습니다. 원어에는 ‘왜냐하면’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놀라운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밥을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내가 학교에 가서 공부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우리가 살면서 늘 평범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 내가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내가 어딜 가고 내게 가장 평범한 것, 내가 잠을 자고 내가 깨어났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이 붙드심입니다. ‘옛날에는 내가 몰랐어요. 내가 왕이 되고 내가 목동 생활을 하고 이 모든 것이 다 그냥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그냥이 아니었군요! 하나님이 날 붙들어 주셨군요!’ ‘내가 밥을 먹고 내가 소화를 시키고 내가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는 것이 모든 것이 다 그냥 된 줄 알았습니다. 아니군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 것이군요!’라는 것을 다윗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 일반적인 모든 것들이 그냥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호주머니에 돈이 있어서 음식을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께서 돈을 주셨군요!’ 내가 사는 모든 삶의 내용들이 여호와가 붙들어 주셨다는 내용을 다윗이 지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세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계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고 싶은 말을 내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시하면 ‘뭐 봤어? 들었어?’ 이제 그런 계시 받지 말고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 그것을 우리는 받아내야 합니다.

6절입니다.
‘천만인이 날 에워싸 진친다 해도’ 원어는 천만인이 아닙니다. 원어는 수만 명입니다. 지금 다윗을 에워싼 반역자는 한 명도 아닌 수만 명이 지금 에워싼 것입니다. 다윗을 가운데 두고 다 에워싼 상태입니다.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처음에 다윗은 두려움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기도 가운데 응답받고 ‘하나님! 저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입니다. 응답받아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보편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 가운데 상황이 어려운데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수만 명이 에워싸는데 다윗이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것이 더 강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삶의 많은 두려움이 있는데 예측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인간의 영에서 오는데, 하나님의 영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충성이니’ 이 성령의 은혜가 나를 주장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염려, 두려움, 불안함은 아직 내 영이 활동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드디어 자기 영이 활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만 활동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란 자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지금 마음에는 기쁨이 넘친 상태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입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안 했다고 칩시다. 그럼 평안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평안함은 어디서 오느냐? 성령에게서 오는데, 성령님의 활동 가운데 있기 위해서 다윗에게 기도를 시켰습니다. 상황 속에서 두려운 가운데 성령이 주관하여 진짜 참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런 일들을 왜 주셨을까요? 영적인 고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두려운 상황을 주셔서 내 영이 잠재워지고 성령이 내 영을 압도해서 성령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육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아는 것입니다. 모든 판단과 계획이 육이 아닌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영이 우리를 주관할 때, 진짜 참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을 향해서 왜 다윗과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천국은 평화의 나라이며 평안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두렵고 고통 가운데 있으면 천국 못 갑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을 맛본 사람이 천국에 가기 때문에 그런 맛을 자꾸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할 것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짜 더 무서워해야 합니다. 사실 상황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반대로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더 무서운 존재로 다가서는 것, 그것이 경외함입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하나님이 영이신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지금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높고 높은 하나님이여,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우주를 만드시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고 하면서 우리는 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기도를 왜 하느냐? 하나님이 멀리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까워지면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윗처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일어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표현을 왜 쓰느냐, 하나님이 사람처럼 느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때 구원은 영생의 구원이 아닌 문제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원수는 적입니다. 뺨은 오번역이며 광대뼈를 말합니다. 치는 것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스메싱’ 주먹으로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원수의 광대뼈를 날리소서!’입니다.

‘악인의 이를 꺽으소서’ 이가 아닌 복수 이빨입니다. 꺽는 것이 아닌 ‘이빨을 부러뜨려 주세요!’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을 그대로 알려 줍니다.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요청을 적나라하게 하는데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면 마치 내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이 선포입니다.

8절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것은 대단원입니다. 다윗이 놀라운 것은 대단원을 쓰는 수법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제까지의 기도의 총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려 주소서’
이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에게는 복입니다. 나에게 있는 문제나 나에게 있는 사항에 대해서 내가 구원을 받으면 나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구원자이며, 나는 그 구원을 통해서 복 받는 자예요’하고 여호와 이레의 구원, 여호와 라파의 구원, 여호와 닛시의 구원, 여호와 샬롬의 구원, 여호와 삼마의 구원 등, 20개 이상의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고, 구원이 임할 때 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은 따로 있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시편 3편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는 기도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축복의 기회입니다. 문제가 올 때, 다윗처럼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응답이 이루어지면 주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는 복 받는 길입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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