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욥기 강해 23장 [연속되는 고난은 더욱더 거룩하게 만듭니다]


욥기23장


[연속되는 고난은 더욱더 거룩하게 만듭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17절까지)


1절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절입니다.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오번역이며 ‘오늘도 내 불평은 쓰라리다’입니다.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stroke(치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맥박, 고동’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욥은 어쩌면 굉장히 쓰라린 고통 가운데 심장의 두근거림이나 심장의 어떤 것이 힘들게 다가온 상황이 아닌가 유추해봅니다. 우리가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장의 박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욥은 아마도 정서적인 고통 때문에 심장의 두근거림이 무겁게 다가오고, 박동으로 계속 짓누르는데 그 고통을 느끼는 정도를 털어놓은 것으로 해석해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stroke’의 단어는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3절입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오번역입니다. ‘오, 나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줄 알았다. 곧 내가 그분의 처소, 즉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다’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오번역이며 ‘내가 그분 앞에 내 사정을 부탁하며 내 입을 내 주장으로 채우리라’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서 자기의 사정을 아뢰겠다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기도만 했던 욥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께 직접 말하겠다고 표현합니다.

5절입니다.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오번역이며 ‘나는 그분이 내게 대답하는 말씀들을 알리라.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는 내용을 이해하리라’입니다. 즉, 직접적인 대화의 기도로 나아가는 진보된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욥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자기의 사정을 직접 아뢰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텐데 그 대답의 내용이 ‘나를 주장하고 고소하는 내용이 아닌, 오히려 나에게 힘을 넣어줄 말씀을 주실 것이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7절입니다.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오번역이며 ‘dispute(이의를 제기하다)’입니다. ‘거기서 의로운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이의를 제기하리라. 그러므로 심판자로부터 내가 건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욥은 고난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내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내 사정을 아뢸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분명히 나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닌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8절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인식하고 직접 만나야 하는데 접촉점이 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내 사정을 아뢰면 해결이 온다’는 진리를 알았는데, 문제는 하나님이 감지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9절입니다.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분을 만나면 해결되는데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말씀으로 만난다고 합니다. 틀리지 않지만, 그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말씀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해답은 다음절에 나옵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내가 지금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순금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왜 만나지 못하며 감지할 수 없는가? 순금으로 정련이 안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에 대해서 해결 받을 수 있는데, 고난을 통해서 내가 정련되면 그때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고난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정련하며 순도 깊은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금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열납되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11절입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 발이 하나님의 발걸음을 계속 따라가는 상태입니다. 발은 주님의 인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따라가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뜻과 모든 섭리를 그대로 내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오번역이며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에서 되돌아가지 않고 필수적인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밥 먹는 것보다 그분의 입에 나오는 말씀을 더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능 중에서 성욕, 식욕, 수면욕 가운데 식욕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입니다. 그런데 이 욕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높게 여긴 본능을 이기는 단계 즉, 순금이 된 상태입니다.

순금이 된 상태에서 그분을 따라가면 진짜 고난이 없을까요?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욥처럼 잘 따라가도 고난은 옵니다. 왜일까요? 오늘의 본론이며 하나님을 직접 만나도 또 다른 고난을 예비해 주시는데 더 순금이 되기 위해서 계속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고난은 우리를 정련시키는데, 마음의 오물들을 다 빼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죄인을 천국에 인도하지 못하십니다. 천국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될 때까지 우리의 고난이 면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필수항목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좋아져야 하는데 미약하니까 계속 단련시켜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오번역이며 ‘그분은 한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분이 자신을 돌이키시겠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어떤 뜻과 생각이 있으신데 우리에 대한 그 생각을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분의 영혼이 어떤 것을 계획하시면 그분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목표점이 있습니다. 예들 들어, ‘너는 타자 칠 때 500타를 넘어야 해!’ 그럼 타자학원에서 500타를 칠 때까지 계속 시킵니다. 또, ‘너는 300타면 돼!’ 마찬가지로 300타를 칠 만큼 시킵니다. 그리고 ‘너는 1,000타를 쳐야 돼!’ 했을 때 ‘저 사람은 끝나는데 나는 언제 끝나는 건가요?’ 물으면, 가르치는 사람이 ‘너는 1,000타를 돌파해야 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지정하신 지점이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이 정도로 만들 거야. 욥! 내가 너를 만들었는데 네게 이 정도를 원해. 다윗! 너에게 이 정도를 원해. 요셉! 네게 이 정도를 원해. 다니엘! 네게 이 정도를 원한다’는 지점을 정하셨고, 하나님 생각은 일정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 반드시 행하십니다. 반드시 행하신 것이 고난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데 다윗의 영성을 높게 잡으신 것입니다. 요셉도 17년 동안 고생하는데 원하시는 지점을 정하신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그 지점까지 고난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되어야 할 지점이 정해져 있습니다. 게으르게 느릿느릿하면 본인만 고생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우리를 만들어 놓으시는데, 우리를 구원케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쓸 그릇으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뜻을 빨리 따르는 것이 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내가 통과되어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는데, 내가 게으르면 게으를수록 맞는 게 많아지는 것입니다. 10대 맞고 하는 것보다 1대 맞고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하셨는데 ‘너는 구원까지만 와! 너는 복음전파까지 와!’ 정한 바가 다 있습니다. 그러면 300타 치는 자는 경리로 취직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불신자에게는 정한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각각 만들어질 때 정하신 지점까지 도달되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계속 고난으로 단련시켜서 더 세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은 필수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천국 못 갑니다. 고난받지 않고서는 죄 성이 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고난을 받아야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받을 때, 나를 단련한다는 것을 믿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변화되어야 만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변화되면 감지가 되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변화되어야 천국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깊은 내면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를 통해 고난에서 해방도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달성되면 잠시 쉬었다가 다음에 또 고난이 오는데 이 모든 것이 다 예정되어 있습니다. 고난으로 절망할까봐 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오번역이며 ‘그러므로 나는 그분 앞에서 아파하며 나는 묵상할 때 그를 두려워하리라’입니다. 결론은 많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안 들을까요? 이유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이 공경하고 따르는 큰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당하면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기는데 죄를 두려워합니다. 왜? 하나님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만드신 분이며 엄청 무섭습니다. 인간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내 마음이 약하니까 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번역하면 ‘내 두려움이 어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이 아니고 그분이 내 얼굴 앞에서 어둠으로 가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어둠에 휩싸여서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이 2가지 있습니다. 신적인 두려움과 사단적인 두려움이 있는데 지금 이것은 바른 두려움입니다. 바른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지옥 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는데, 그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거늘’ 잠언 말씀에 나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갖는 모든 사고들입니다. 거기에 선과 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함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환경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자체가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꼼짝 마라’입니다. 그게 고난이 주는 선물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고,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왕들이 잘하다가 막판에 지옥으로 던져졌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웃시야는 굉장히 잘 섬겼는데 지옥 갔습니다. 그렇게 잘 섬겼는데 막판에 떠나면 지옥으로 던져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하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봐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는 하나님과 맞먹으려 하는데 하나님의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맞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시면 모는 것이 끝나기에 하나님 앞에 우리는 깨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온전해지는 것만이 가장 좋은 지혜인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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