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욥기 강해 2장 [더 강한 징계 : 질병]
욥기 2장
[더 강한 징계 : 질병]
1절입니다.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지난번에는 욥의 낙타, 양, 소, 나귀가 다 죽고 자녀들도 다 죽게 되는데, 그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욥은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회의가 열리는데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오고, 하나님의 아들들도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실제 나온 건 아니고 영적인 흐름인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일들은 다 천국에서 하는 것들입니다. 이 땅에서 예배를 드리든 우리가 어떤 삶을 만나든 이미 천국에서 다 이루어진 것인데, 지금 천국에서 표현된 것입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지난번에도 똑같이 질문했는데 인사입니다. 사탄이 사람처럼 막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영이니까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은 영적으로는 다 아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사탄에게 욥은 완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하나님이 사탄에게 화를 내시는데 욥이 고통받는 이유가 죄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고통이 꼭 죄로 인해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욥이 고통받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욥은 선한 사람이지만 자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아내도 천국 갈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욥 자신만 천국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바꾸고 변화시켜서 고난을 허용한 것입니다.
환난이 올 때 ‘하나님! 이 고통을 나에게 왜 주십니까?’라며 탄원하는데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죄 아니면 하나님의 뜻 둘 중 하나입니다. 만약, 죄로 인한 것이면 회개하면 되고 하나님의 뜻이면 그냥 견디면 됩니다.
누가 다리가 부러져서 진단할 때 ‘당신의 다리가 부러진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을까요? 정답은 모른다입니다.
우리는 교회 성도가 갑자기 쓰러지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신방이나 기도 요청을 받을 때, 이것이 죄 때문이면 회개를, 하나님의 뜻이면 빨리 회복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 겪으라고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어릴 때부터 소경으로 난 자에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욥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자신만 구원받고 남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 죄가 있는데, 이 죄는 계명 불순종이라는 범법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적인 목표에 미달한 죄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하나님의 뜻 때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을 점검하여 가까운 내 아내와 자녀를 구원받게 해야 하는데 욥은 이것이 안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아쉬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욥이 ‘내가 내 아들과 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했구나!’라고 탄식하며 나아갔다면, 아마 이런 고난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환경적인 고통을 당할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빨리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방치하고 내버려두면 욥의 경우처럼 고난이 치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번 고통이 오면 고통이 더 깊어지기 때문에 빨리 돌아서야합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 속에는 다 원인이 있습니다. 자녀가 말을 안 들을 때는 부모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질병이나 파산, 이혼, 재난이 올 때, 그 깊은 곳에는 다 인간의 죄가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빨리 발견할수록 회복이 그만큼 빠른 것입니다.
한 대 때렸는데 못 깨달으면 더 세게 때리는 것입니다. 맞기 전에 빨리 돌아서면 됩니다.
4절입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놓고서는 모든 것을 버립니다. 막상 죽음의 문제가 부딪치면 사람도 돈도 아쉽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꼼짝 못하기에, 사탄은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욥의 생명을 건드리면 욥이 범죄 할 것이고, 죽음 앞에 신앙도 필요 없다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5절입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생명과 질병을 치라고 말합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이 욥의 생명을 제외한 질병을 허용합니다. 질병은 훨씬 심각한데 재산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병이 나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족, 돈, 일도 다 all stop해야 됩니다.
지금 욥을 더 큰 고난으로 몰고 갑니다. 우리가 질병에 걸리면 더 세게 기도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빨리 돌아서면 괜찮아지는데 방치하면 이미 늦은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중한 질병이 왔을 때, 겨우 회개할까, 말까 합니다. 그동안 회개하지 않다가 어려움에 부딪치면 겨우 회개하려 하는 것입니다. 큰 병이 걸리기 전까지는 회개가 뭔지를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도 회개가 제대로 안 되면 질병으로 죽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데, 우리가 아는 유명한 목사들 중 많은 사람이 질병으로 죽습니다. 암에 걸려서 죽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 중한 죄를 지었는데 숨기며 산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추앙합니다.
질병은 다 죄에서 옵니다. 물론 욥처럼 예외가 있지만, 질병은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어길 때 걸리는 것입니다. 병이 왔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인간은 불명예를 못 이깁니다. 사람은 다 자기 고집이 있는데 이것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단순한 가려움이 아니라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옵니다.
8절입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여기서 ‘potsherd(질그릇)’ 조각이라고 되어있는데, 집에서 먹던 밥그릇이 깨진 건가 아니면 집에 기와장이 깨진 것일까요? 아마 집이 무너져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묘사되지 않았지만 사람이 다 망해도 집이 번듯하면 아내가 그래도 화를 덜 낼 텐데 욥의 아내가 열을 엄청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달리 여자에게 집은 중요합니다. 아마 집도 무너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땅에 앉아서 긁었다고 되어 있는데 물론 가려워서 땅에 앉아 긁을 수도 있지만 집도 무너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9절입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여기서 욥이 아내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는 아내와 함께 살았던 욥도 대단합니다. 욥이 아내에게 비난을 듣는 것은, 그동안 아내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비난을 들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는 눈이 커야 합니다. 물론 욥의 아내가 죄인이지만, 아내를 인도하지 못한 욥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욥의 아내도 기독교인이지만 선이 안 된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질병이 와도 죄를 짓지 아니하고 아내로부터 오는 모든 핍박과 고통도 견뎌냅니다.
의에 기준은 사람마다 커트라인과 완벽 사이 어디쯤에 있을 수 있는데, 낮은 차원에서 보면 욥은 의로운 자이지만, 높은 차원에서는 미흡한 것입니다. 욥은 자기 외에는 구원에 실패한 삶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의 뜻에 어긋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데만은 에돔의 수도입니다. 데만은 에서의 손자인데, 데만의 족속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아브라함 이전 사람인지 이후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만약, 데만 사람이 에서 손자라면 욥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하기 전, 애굽으로 넘어왔을 당시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데만 사람’은 구원에 아직 이르지 못한 유사 기독교인이고, ‘수아 사람’은 구원과 거리가 좀 더 먼 유사 기독교이고, ‘나아마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나중에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욥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유사 기독교인이 와서 대화하는 과정에서 드디어 그들도 죄를 깨닫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고난이 남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욥의 고난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욥을 통해 세 친구가 구원받고 동시에, 욥의 자녀들이 마지막 장에 이름이 나오는데 자녀들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욥의 신앙으로 남을 구원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욥은 이 큰 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충만하지만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 세 친구를 등장시킵니다. 세 친구와의 대화 과정이 욥기이고, 욥기는 철학적인 내용이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욥기는 철학책입니다. 물론 거짓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진리에 근접한 철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아니지만 근접한 묘사인 것입니다
욥기는 예수님 말씀처럼 완벽한 진리는 아니지만 신앙에 큰 도움을 줍니다. 우리의 신앙 틀을 많이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욥과 세 친구의 대화는 마치 신앙 토론과 비슷한데 토론의 내용이 완벽한 진리에 좀 미흡하지만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근접한 유사 기독교인과 불신자와 참 기독교인의 대화를 통해서 죄를 도출해 냅니다. 맨 마지막에 하나님의 철학이 나오는데, 이것을 통해 욥의 세 친구 모두가 진리를 깨닫게 되어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그들이 따로 온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서 같이 온 것인데 이것은 서로 상당히 친함을 의미합니다.
12절입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이들이 얼마나 친했냐면, 욥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옷을 찢고 땅의 흙덩이를 머리에 뿌립니다.
13절입니다.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의 몰골을 볼 수가 없고 욥의 처참한 고통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종기는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라, 안에서 많은 것들이 파괴되는 심각한 질병임을 보여줍니다. 욥은 몸 내부와 외부 전체에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들은 위로의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욥의 아내도 떠나갑니다. 아내, 자녀, 재산 모두 잃고, 몸에 어마어마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욥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엄청난 고난 앞에서 욥과 욥의 친구가 나눈 대화의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을 통해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진리에 가까워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고통이 없으면 약간씩 사고가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오면 아무것도 필요 없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나를 맡기게 됩니다. 고통을 겪을수록 우리는 더 진리에 가깝게 됩니다.
세 친구가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통에 같이 동참할 때 지혜와 은혜가 들어옵니다. 고통은 엄청난 유익과 보람이 있습니다. 고통받을수록 더 정확해지고, 건전해지고, 맑아집니다. 우리는 고통을 부정적으로 보면 안 되며 고통에 동참해야 합니다.
욥기는 진리는 아닐지라도 많은 고통 속에서 나온 인간의 철학적인 산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버리기는 아까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절대로 완벽한 진리에 도달 할 수 없지만 수많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진리에 근접해집니다. 우리의 사고구조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결국 구원도 일어나고 인생에 대한 모든 처세와 바른 관점들이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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