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욥기 강해 13장 [고난은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입니다]
욥기 13장
[고난은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입니다]
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28절까지)
1절입니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욥은 세 친구가 본 것을 내가 보았고, 그들이 깨달은 내용을 내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내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너희들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합니다.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내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너희들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합니다.
3절입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와 말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말을 들어보니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 굳이 들을 필요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도저히 내 상대가 안 되고 대화도 안 되니 하나님과 말할 것이라 토로합니다.
친구들이 어떤 말을 해줄까? 기대했는데 새로운 내용도 없고 맞지도 않으니 실망한 것입니다. 욥은 세 친구의 말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겠다고 말하며, 실제로 나중에 기도로 이어집니다.
4절입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오번역이며 너희는 ‘forger(위조자)’ 즉, 거짓말을 잘 만들어내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너희는 나를 치료할 수 없는 의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거짓말들이고 나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 친구는 욥이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하니 회개하면 하나님이 풀어주실 것이라 말하지만 욥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설사 맞다 할지라도, 그 말들이 욥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세 친구에게 너희가 잠잠한 것이 지혜라 말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한 사람 앞에서 “거봐~ 똑바로 하라고 했지!”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힘든 가운데 있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때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6절입니다.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만 내가 하는 말을 한번 들어보라 권면합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오번역이며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악하게 말하겠느냐’입니다. 너희는 지금 죄를 지으면 고난이 오고 회개를 하면 좋아진다고 말하는데, 나에게 있어 이 말은 거짓이라 항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제 모든 경우에 그렇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인을 형통하게 하시고 죄인에게 번성을 주시기도 합니다. 세 친구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권선징악을 말하지만, 이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나 같은 선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의인에게 핍박을 주고 악인에게 형통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질을 모르면서 어떤 사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함부로 진단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더 붙들게 됩니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욥이 볼 때 그들의 말은 진리가 아니며 내용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오번역이며 ‘그분의 person(사람)을 따르려느냐’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한 존재로서의 ‘person’이며, 욥은 세 친구에게 ‘너희들이 그런 존재를 받아들이겠느냐’고 변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오번역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contend(주장하다)’입니다. 우리는 어떤 누군가의 견해를 받아들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주장이라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을 위해 변론한다고 하지만 잘못된 존재를 받아들인 결과로 인해 그릇된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즉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입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심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내용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오번역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웃는 것처럼 너희도 그분을 ‘mock(비웃다)’입니다. 즉 너희는 현재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온 내용이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즉 ‘만약 너희가 비밀스럽게 어떤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그분이 너희를 반드시 책망하실지니’입니다.
세 친구가 말한 잘못된 내용이 꼭 마귀가 하게 한 것이 아닐지라도 친구들의 말은 부분적 진리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들을 책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을 굉장히 책망하십니다. 욥이 이들보다는 한 수 위임을 보여줍니다.
세 친구는 그들의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세상의 말과 진리가 섞어서 나온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일반적인 내용이나 구전된 내용을 종합해서 한 말이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책망하시는데, 의로운 욥을 의롭지 않다고 말한 부분에서부터 이미 잘못된 진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그의 존귀는 하나님의 뛰어남을 말하며, 뛰어나신 하나님과 세 친구의 괴리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말들로 인해 하나님이 너희를 두렵게 할 것이라 말합니다.
12절입니다.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오번역입니다. 너희들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나 경험한 내용이고, 이런 기억들은 결국 재와 같다는 것입니다. 즉, 별로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모든 변론들을 묵사발 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오번역이며 ‘너희의 몸이 점토의 몸이니라’입니다. ‘썩어서 없어질 흙’으로 지은 점토에서 나오는, 맞는 것 같지만 맞지 않는 의미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너희가 나에게 많은 말을 했고 나도 알아들었으니 이제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내가 다 당할 것이라 말합니다. 친구들의 말들을 일축하고 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와 깨달은 내용을 가지고 결론을 내립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너희들의 말대로 이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이라면 하나님께 회개하여 해결 받으면 될 것인데 내가 뭐하려고 이 고생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나도 내 살을 깨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죄가 있거나 회개가 안 되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말합니다.
15절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오번역이며 ‘slay’는 ‘죽여 버리다’가 정확합니다. 이방인들을 죽일 때 slay를 쓰는데, 욥은 자신을 죽여 버리실지라도 여전히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만큼 아직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그분 앞에 내가 가야 할 길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말합니다. 고난 전이나 후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의로운 가운데 있고 앞으로도 의로운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친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갈 것이라 말합니다.
16절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나는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며, 결국에는 구원에 이를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육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육적으로 죽임을 당해도 영적으로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와 말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말을 들어보니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 굳이 들을 필요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도저히 내 상대가 안 되고 대화도 안 되니 하나님과 말할 것이라 토로합니다.
친구들이 어떤 말을 해줄까? 기대했는데 새로운 내용도 없고 맞지도 않으니 실망한 것입니다. 욥은 세 친구의 말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겠다고 말하며, 실제로 나중에 기도로 이어집니다.
4절입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오번역이며 너희는 ‘forger(위조자)’ 즉, 거짓말을 잘 만들어내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너희는 나를 치료할 수 없는 의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거짓말들이고 나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 친구는 욥이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하니 회개하면 하나님이 풀어주실 것이라 말하지만 욥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설사 맞다 할지라도, 그 말들이 욥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세 친구에게 너희가 잠잠한 것이 지혜라 말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한 사람 앞에서 “거봐~ 똑바로 하라고 했지!”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힘든 가운데 있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때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6절입니다.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만 내가 하는 말을 한번 들어보라 권면합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오번역이며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악하게 말하겠느냐’입니다. 너희는 지금 죄를 지으면 고난이 오고 회개를 하면 좋아진다고 말하는데, 나에게 있어 이 말은 거짓이라 항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제 모든 경우에 그렇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인을 형통하게 하시고 죄인에게 번성을 주시기도 합니다. 세 친구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권선징악을 말하지만, 이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나 같은 선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의인에게 핍박을 주고 악인에게 형통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질을 모르면서 어떤 사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함부로 진단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더 붙들게 됩니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욥이 볼 때 그들의 말은 진리가 아니며 내용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오번역이며 ‘그분의 person(사람)을 따르려느냐’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한 존재로서의 ‘person’이며, 욥은 세 친구에게 ‘너희들이 그런 존재를 받아들이겠느냐’고 변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오번역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contend(주장하다)’입니다. 우리는 어떤 누군가의 견해를 받아들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주장이라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을 위해 변론한다고 하지만 잘못된 존재를 받아들인 결과로 인해 그릇된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즉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입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심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내용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오번역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웃는 것처럼 너희도 그분을 ‘mock(비웃다)’입니다. 즉 너희는 현재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온 내용이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즉 ‘만약 너희가 비밀스럽게 어떤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그분이 너희를 반드시 책망하실지니’입니다.
세 친구가 말한 잘못된 내용이 꼭 마귀가 하게 한 것이 아닐지라도 친구들의 말은 부분적 진리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들을 책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을 굉장히 책망하십니다. 욥이 이들보다는 한 수 위임을 보여줍니다.
세 친구는 그들의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세상의 말과 진리가 섞어서 나온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일반적인 내용이나 구전된 내용을 종합해서 한 말이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책망하시는데, 의로운 욥을 의롭지 않다고 말한 부분에서부터 이미 잘못된 진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그의 존귀는 하나님의 뛰어남을 말하며, 뛰어나신 하나님과 세 친구의 괴리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말들로 인해 하나님이 너희를 두렵게 할 것이라 말합니다.
12절입니다.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오번역입니다. 너희들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나 경험한 내용이고, 이런 기억들은 결국 재와 같다는 것입니다. 즉, 별로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모든 변론들을 묵사발 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오번역이며 ‘너희의 몸이 점토의 몸이니라’입니다. ‘썩어서 없어질 흙’으로 지은 점토에서 나오는, 맞는 것 같지만 맞지 않는 의미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너희가 나에게 많은 말을 했고 나도 알아들었으니 이제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내가 다 당할 것이라 말합니다. 친구들의 말들을 일축하고 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와 깨달은 내용을 가지고 결론을 내립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너희들의 말대로 이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이라면 하나님께 회개하여 해결 받으면 될 것인데 내가 뭐하려고 이 고생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나도 내 살을 깨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죄가 있거나 회개가 안 되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말합니다.
15절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오번역이며 ‘slay’는 ‘죽여 버리다’가 정확합니다. 이방인들을 죽일 때 slay를 쓰는데, 욥은 자신을 죽여 버리실지라도 여전히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만큼 아직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그분 앞에 내가 가야 할 길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말합니다. 고난 전이나 후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의로운 가운데 있고 앞으로도 의로운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친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갈 것이라 말합니다.
16절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나는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며, 결국에는 구원에 이를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육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육적으로 죽임을 당해도 영적으로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는 ‘위선자’를 말하며, 위선자는 하나님 앞에 가지 못하고 지옥을 갑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위선자들은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의롭지 않기에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위선자는 하나님 앞에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국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데 위선자는 죄가 있는데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짓이 있으면 천국 못 갑니다. 그렇다면 거짓이 없는 자가 세상에 있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자입니다. 즉, 의롭다함은 정죄 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면 죄가 다 있는데 하나님은 누구는 죄 있다 하시고 누구는 없다 하십니다. 실제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 없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으시면 의로운 사람인 것이고, 하나님이 그 사람 음흉한 사람이야 하면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죄로 인정하면 지옥이며 이것이 정죄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했다함은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신 기준에서 죄의 수위가 낮으면 죄가 있더라도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실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욥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에 그것이 정죄성이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는 의롭지만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고난을 정죄로 이해한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이제 욥이 자신을 변론합니다.
18절입니다.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나는 내가 ‘죄가 없다’라고 인정받게 될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중요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받는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고난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고난을 허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찾습니다. 다양한 이유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칼과 위험과 적신과 기근이 오지만 너무 힘들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19절입니다.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20절입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욥은 지금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1절입니다.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원어는 ‘당신의 손이 나로부터 멀리 철수시켜 주세요’입니다. 즉, 나를 더 이상 징계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오번역이며 ‘당신의 두려움이 나를 두렵게 하지 마소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낙심되고 괴롭고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옵니다. 이런 마음을 제거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때로는 환경이 너무 어려울 때 불평이 올라올 수 있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올수록 더 담대해야 합니다. 축복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고난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훨씬 유익합니다. 잘 되면 교만해지고 쾌락으로 빠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살기가 좋을수록 쾌락을 찾습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전쟁도 없고, 의식주에 문제가 전혀 없을 때 지옥 가기 더 쉬운 것입니다.
환경의 어려움이 아닌 축복이 대환란입니다. 점점 세상은 더 좋아지고 편리해집니다. 축복은 우리를 먹고 싶은 것을 찾아다니게 하고, 성적인 만족과 눈에 보이는 쾌락을 쫓아다니게 합니다. 결국, 이 축복과 쾌락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게 됩니다. 어려운 환경이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이런 위대한 지혜의 사람도 하나님이 버리시는데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천 명의 왕녀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 즐거움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가 된 것입니다.
쓴 것이 약이고 단 것이 독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면서 많은 어려움이 올 수 있는데, 이것이 꼭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그냥 고난 앞에 감사하면 결국, 이것이 나를 만드는 과정이 됩니다. 고난이 우리를 세상 향락에 빠지게 않게 하고 건실하게 합니다.
죄는 어떻게 끊느냐? 고난이 오면 죄가 끊어집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미워하는 것이지, 내가 바쁘면 누구를 미워할 시간도 없습니다. 이런 감정이 생기는 것도 시간이 남아돌아서입니다. 고난이 우리를 만들기 때문에 고난 앞에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22절입니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하나님이 불러 주시면 내가 대답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까요? 잘 안 하십시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우리에게 계시가 임한다면 그나마 고난을 참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너무 힘이 듭니다. 욥은 하나님께 계시를 달라고 탄원하지만 하나님의 어떤 위로도 없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을 때 영적 고난이 옵니다. 인간의 최악의 순간은 하나님의 음성이 없을 때입니다. 욥도 이런 영적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계시를 구합니다. 고난과 두려움으로 꽉 찼는데 계시가 없는 것입니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내가 탄원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3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는 올려드리는 기도, 2단계는 내려오는 기도, 3단계는 주고받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최고봉입니다. 욥은 그동안 하나님과 대화하는 엄청 신령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다시 간구하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죄악성을 하나님 앞에 토로합니다.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허물은 오번역이며 ‘transgression(위법)’입니다. 나의 위법과 나의 죄를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자범죄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들을 구원으로 인도 하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에서는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사람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임을 아시지만, 그 사람을 도와주길 바라시며 그것을 외면할 때 고난을 주십니다. 믿는 사람, 구원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고난입니다.
욥의 경우처럼 죄 없이 고난을 당할 때, 그 이유를 찾아내는 과정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틀을 보지 못하고 지엽적으로 살아가지만 다양한 이유로 고난이 올 때,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지혜입니다.
24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원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번역하면 ‘왜 나를 날리는 낙엽처럼 부서지게 하시며 그루터기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십니까’입니다.
26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나에 대한 아주 안 좋은 것들을 기록하시고, 젊었을 때 죄악들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욥의 조그마한 단점들까지도 다 찾고 모아서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과거 지나간 세월에 조그마한 것도 다 끄집어내십니다. 지금은 의롭다 할지라도 과거에 하나님 앞에 잘못한 많은 내용들이 오늘 나의 고난에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은 곰팡이가 나고 썩었으며 옷은 좀먹는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지은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다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다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노출할 때 더욱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il.com)
위선자는 하나님 앞에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국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데 위선자는 죄가 있는데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짓이 있으면 천국 못 갑니다. 그렇다면 거짓이 없는 자가 세상에 있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자입니다. 즉, 의롭다함은 정죄 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면 죄가 다 있는데 하나님은 누구는 죄 있다 하시고 누구는 없다 하십니다. 실제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 없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으시면 의로운 사람인 것이고, 하나님이 그 사람 음흉한 사람이야 하면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죄로 인정하면 지옥이며 이것이 정죄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했다함은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신 기준에서 죄의 수위가 낮으면 죄가 있더라도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실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욥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에 그것이 정죄성이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는 의롭지만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고난을 정죄로 이해한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이제 욥이 자신을 변론합니다.
18절입니다.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나는 내가 ‘죄가 없다’라고 인정받게 될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중요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받는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고난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고난을 허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찾습니다. 다양한 이유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칼과 위험과 적신과 기근이 오지만 너무 힘들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19절입니다.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20절입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욥은 지금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1절입니다.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원어는 ‘당신의 손이 나로부터 멀리 철수시켜 주세요’입니다. 즉, 나를 더 이상 징계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오번역이며 ‘당신의 두려움이 나를 두렵게 하지 마소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낙심되고 괴롭고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옵니다. 이런 마음을 제거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때로는 환경이 너무 어려울 때 불평이 올라올 수 있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올수록 더 담대해야 합니다. 축복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고난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훨씬 유익합니다. 잘 되면 교만해지고 쾌락으로 빠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살기가 좋을수록 쾌락을 찾습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전쟁도 없고, 의식주에 문제가 전혀 없을 때 지옥 가기 더 쉬운 것입니다.
환경의 어려움이 아닌 축복이 대환란입니다. 점점 세상은 더 좋아지고 편리해집니다. 축복은 우리를 먹고 싶은 것을 찾아다니게 하고, 성적인 만족과 눈에 보이는 쾌락을 쫓아다니게 합니다. 결국, 이 축복과 쾌락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게 됩니다. 어려운 환경이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이런 위대한 지혜의 사람도 하나님이 버리시는데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천 명의 왕녀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 즐거움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가 된 것입니다.
쓴 것이 약이고 단 것이 독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면서 많은 어려움이 올 수 있는데, 이것이 꼭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그냥 고난 앞에 감사하면 결국, 이것이 나를 만드는 과정이 됩니다. 고난이 우리를 세상 향락에 빠지게 않게 하고 건실하게 합니다.
죄는 어떻게 끊느냐? 고난이 오면 죄가 끊어집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미워하는 것이지, 내가 바쁘면 누구를 미워할 시간도 없습니다. 이런 감정이 생기는 것도 시간이 남아돌아서입니다. 고난이 우리를 만들기 때문에 고난 앞에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22절입니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하나님이 불러 주시면 내가 대답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까요? 잘 안 하십시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우리에게 계시가 임한다면 그나마 고난을 참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너무 힘이 듭니다. 욥은 하나님께 계시를 달라고 탄원하지만 하나님의 어떤 위로도 없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을 때 영적 고난이 옵니다. 인간의 최악의 순간은 하나님의 음성이 없을 때입니다. 욥도 이런 영적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계시를 구합니다. 고난과 두려움으로 꽉 찼는데 계시가 없는 것입니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내가 탄원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3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는 올려드리는 기도, 2단계는 내려오는 기도, 3단계는 주고받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최고봉입니다. 욥은 그동안 하나님과 대화하는 엄청 신령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다시 간구하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죄악성을 하나님 앞에 토로합니다.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허물은 오번역이며 ‘transgression(위법)’입니다. 나의 위법과 나의 죄를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자범죄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들을 구원으로 인도 하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에서는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사람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임을 아시지만, 그 사람을 도와주길 바라시며 그것을 외면할 때 고난을 주십니다. 믿는 사람, 구원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고난입니다.
욥의 경우처럼 죄 없이 고난을 당할 때, 그 이유를 찾아내는 과정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틀을 보지 못하고 지엽적으로 살아가지만 다양한 이유로 고난이 올 때,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지혜입니다.
24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원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번역하면 ‘왜 나를 날리는 낙엽처럼 부서지게 하시며 그루터기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십니까’입니다.
26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나에 대한 아주 안 좋은 것들을 기록하시고, 젊었을 때 죄악들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욥의 조그마한 단점들까지도 다 찾고 모아서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과거 지나간 세월에 조그마한 것도 다 끄집어내십니다. 지금은 의롭다 할지라도 과거에 하나님 앞에 잘못한 많은 내용들이 오늘 나의 고난에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은 곰팡이가 나고 썩었으며 옷은 좀먹는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지은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다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다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노출할 때 더욱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kck433342@gmail.com)
댓글
댓글 쓰기